보도.인물

종합.해설 분류

베스도 앞에서의 변론 / 행 25:1-12

작성자 정보

  • 연합기독뉴스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베스도 앞에서의 변론 / 행 25:1-1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베스도

베스도는 가이샤라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을 봅니다. 그 당시에 가이샤라는 행정부가 있었던 도시라면 예루살렘은 종교의 중심으로 유대인들이 사는 도시였습니다. 베스도는 그들의 상황을 알아보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스도는 놀랐습니다. 신임 총독을 보자마자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이었던 대제사장들과 높은 사람들은 바울을 고소하고 있습니다.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계속해서 바울을 미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는 마음이 이렇게 오래 갈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열정이 지나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바울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요구에 원칙적으로 대응하는 베스도

본문 4-5절을 보면 베스도는 유대인들의 요구에 즉각적으로 대답을 하지 않고 원칙적으로만 대답을 하였습니다. 문제는 지금 이 베스도가 바울에 대한 사건을 자세히 알고 있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9절을 보면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 고 하였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즉, 베스도는 유대인의 마음을 사고자 하여 바울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이 경우 만약에 베스도가 유대인의 속셈을 알고 있었다면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바울의 안전을 최우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스도가 유대인들에게 가이샤라로 와서 고발하라고 권면한 것은 단지 실제적인 이유 때문인 것으로 보여 지고 있습니다.

 

나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변론하는 바울

본문 6-8절을 보면 베스도 총독이 예루살렘 8-10일 전도를 마물다가 다시 가이샤라로 내려갔습니다. 아마도 베스도는 예루살렘에 머무는 동안 충분히 유대인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또한 그들의 유대인 공동체에 얼마나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파악했을 것입니다. 가이샤라에 온 베스도는 그 다음 날 바울을 재판정에 호출하여 세우고 벨릭스 총독 때처럼 똑같이 재판을 진행했습니다. 베스도와 함께 가이샤라에 온 유대인들은 베스도가 재판장에 나오자 바울에 대하여 여러 가지‘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의 사건이 왜 그렇게 중대한 사건인지에 대하여서는‘능히 증거를 대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베스도에게 자신의 결단을 이야기 하는 바울

본문 9-12절을 보면 유대인의 눈치를 살피는 베스도와 최후의 결단을 보이는 바울을 보게 됩니다. 즉, 총독은 유대인을 치리하라고 보냄을 받은 사람인데 오히려 유대인의 눈치를 보는 베스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는 권면을 베스도에게 들은 바울은 자신의 결단의 말을 하였습니다. 10-11절을 메시지 성경은 “이 순간 나는 황제의 법정에 서 있습니다! 나는 얼마든지 이 자리에 설 권리가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여기에 서 있을 것입니다. 나는 유대인들에게 아무 것도 잘못한 것이 없으며, 총독께서도 나만큼이나 그 사실을 잘 아십니다. 만일 내가 범죄를 저질러 사형을 받아 마땅하다면, 기한을 정하십시오.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고발이 사실무근이라면 – 그렇다는 것을 총독께서도 아십니다- 아무도 저들의 터무니없는 수작을 따르라고 내게 강요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이만큼 시간을 허비한 것으로 충분합니다. 나는 황제에게 상소 합니다.” 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유대의 종교 재판을 있는 것이 아니라 로마인으로서 ‘가이사의 재판’을 받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한다고 하니까? 12절을 보면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이르되 네가 가이사에게 상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라 하니라.” 고 했습니다. 베스도는 잠시 동안 그의 참모들과 논의를 한 후에 평결을 내렸습니다.‘가이사에게 상소했으니 가이사에게 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베스도의 입장에서는 손해 볼 일이 없는 판결이었습니다. 오히려 바울이라는 골치 아픈 문제를 가이사에게 떠넘기면서 동시에 바울을 고발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적당한 변명거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베스도에게는 일석이조가 된 셈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생명보다도 사명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입니다.‘얼마나 오래 사는가?’보다‘왜 살아야 하는가?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더 가치 있는 질문으로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만일 복음을 위해서, 진리를 위해서 우리의 생명을 내려놓아야 한다면 그것조차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베스도도 죽고, 바울도 죽게 됩니다. 그러나 베스도는 사람들 눈치 보면서 자리에 연연하다가 총독의 임기도 채우지 못하고 죽었고, 바울은 사명을 모두 완수하고 죽었습니다. 누가 정말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았습니까?

 

신용대 목사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최근글


인기글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