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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도시를 가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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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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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특집

- 비텐베르크 
▲ 비텐베르크 시 전경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 비텐베르크는 여러 면에서 종교개혁의 중심지였다. 루터가 신학교수로 성경을 연구하며 학생들을 가르친 곳이었으며, 로마를 여행하고 돌아와 교황제도에 대한 의문을 멈추지 못하였으며, 복음의 감동은 그를 끝내 궁정 교회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내걸게 하였다.

또한 비텐베르크는 루터의 개혁사상을 지킨 보루였다. 지방 영주이자 선제후인 프리드리히가 비텐베르크 대학을 설립하고 교수 루터가 이곳에 오자, 학생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개혁사상에 관심있는 귀족, 정치인, 학자 등이 격렬한 토론을 벌였고, 그들은 또 동서남북으로 개혁 정신을 퍼날랐다. 루터는 이곳을 본거지로 독일 여러 곳으로 설교, 강연, 논쟁을 위하여 여행을 떠났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루터가 가장 안심했던 때는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파문당하고,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고 피신하는 과정에서 비텐베르크로 귀환할 때였다. 비텐베르크는 개혁 사상의 전진기지였으며, 개혁을 추구하는 이들의 피난처와 산성이 됐다.

비텐베르크는 루터의 제2의 고향이었다. 그는 수녀로서 신앙의 자유를 위해 수녀원을 탈출한 카타리나 보라를 만나 이곳에서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다. 부인의 열정적 헌신으로 루터는 마음 놓고 개혁 사역을 다녔다. 루터는 원래 수도승이나 신부가 되고자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를 개혁자가 되게 하였다. 그는 불의한 자들이 지배하는 신앙과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투쟁가였다. 그의 저술 ⌜교회의 바벨론 유수⌟라는 글은 당시 교회가 왜곡된 신앙관에 사로잡혀있던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 루터가 영면하고 있는 궁정교회

거룩한 교회가 이방인의 포로 상태처럼 사로잡혀 있다고 본 것이다. 루터는 복음의 편에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예언자요 선지자였다. 막강한 종교개혁의 불씨는 역설적이게도 나약한 한 인간의 영혼에서 불타올랐다.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였다.

1546년 2월 18일, 루터는 비텐베르크 자신의 집에서 하나님의 품에 안긴다. 진리를 위한 투쟁과 논쟁, 생명의 위협과 회유, 적대자들의 증오와 비웃음에서 완전한 해방을 맞았다. 1483년에 태어났으니 그의 나이 63세였다. 2월 22일, 루터는 자신이 반박문을 내걸었던 궁정 교회에 안장되었다. 종교개혁은 이제 믿음의 후손들과 그들의 교회로 넘겨졌다. 루터는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최선을 다해 이루어 드렸던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가 준엄한 눈으로 지금도 우리들을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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