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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도시를 가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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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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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된 역사의 성 스테판교회 종교개혁 500주년 특집

오스터비크

만약에 우리나라가 상공업을 중시하는 전통이 있었다면 어떤 나라가 되어있을까. 조선시대 500년 동안 유교 가치관이 세상을 지배하고, 사대부 집안에 속해야 세상 사는 맛이 났으니 사회가 기형적인 면이 적지 않았다. 사농공상으로 사회가 구조화 되면서 양반은 노동에서 멀어졌고 모든 일은 평민이 도맡아 하지만 천시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도 출세라는 명분 아래 젊은 인재들이 고시(考試)로 몰려드는 것은 이런 구습의 영향임이 분명하다.
종교개혁 시대, 독일은 어땠을까. 오스터비크(Osterwieck)는 조선 시대와 비교하자면 농공상들이 몰려사는 도시였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천민으로 하대받는 자들의 도시였다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로 말하자면 유대인들로부터 비웃음거리가 되던 사마리아 지역의 어느 도시같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는가?” 그런 시각으로 보자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과연 오스터비크 같은 천박한 노동자, 장사치들이 모여사는 도시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을까. 그러나 이 도시는 달랐다.
오스터비크는 일찍이 루터 선생의 사상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세상을 뒤흔드는 새로운 사상이었다. 그들을 벌겋게 달군 감동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상인들, 수공업자들은 생산품을 팔기 위해 이 도시 저 도시로 다녀야 했는데, 그들의 발걸음이 곧 개혁 사상의 통로가 되었던 것이다. 바울 사도가 로마 군인들이 닦아놓은 제국의 도로를 복음 전파의 길로 활용한 것처럼 상공인들의 실크로드는 개혁사상을 실어나르는 축복의 길로 변해갔다. 종교개혁의 열기가 북쪽으로 나아가는 창구 역할을 한 도시가 바로 오스터비크였다.
이 도시는 1535년에 벌써 루터 밑에서 공부한 목사를 초빙하는 열정을 보였다. 도시민들은 앞을 다투어 신앙고백을 하였는데 그 증거는 오늘날에도 뚜렷이 확인된다. 그들이 세운 건물이나 집에서 종종 성경구절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시장을 지냈던 이의 집에는 이런 글씨가 각인되어 있다.
“VDMIAE. Verbum Dominum Manet in Aeternum”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있도다). 오스터비크라는 도시는 그 역사로 역설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있도다.”

▲ 오스터비크 상공인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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