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인물

종합.해설 분류

루터의 도시를 가다(14)

작성자 정보

  • 연합기독뉴스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 성만찬 주제로 논쟁을 하고 있는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 특집

- 예 나

루터는 1521년 겨울 독일어 성경 번역을 시작했다. 바르트부르크 성에 갇힌 듯 머물러 있으면서 성경 번역에 몰두하였다. 다음 해인 1522년 3월 1일 신약 성경 번역을 마쳤고, 9월 첫 번째 독일어 신약 성경이 출간되었다. 9월에 발간되었다고 하여 ‘9월 판 성경’이라 불리우기도 하며, 두 번째로 12월에 출간된 성경은 ‘12월 판 성경’이라 명명하기도 한다.
여러 도시들을 여행하며 루터는 수많은 논쟁을 벌였고, 성경 번역을 하면서 그의 개혁 사상은 정립이 되어갔다.
1520년 초부터 나온 루터의 개혁 저술들은 1524년에도 쉬지 않고 쏟아져 나왔다. 예를 들면 ‘교회의 사제 초빙권’, ‘예배의 순서’, ‘세속 권세와 순종’, ‘유대 혈통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잘못된 선지자 거부권’, ‘매매 행위와 이자에 관하여’ 등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어 미망(迷妄)에 빠진 신앙계를 바로 잡으려 했다.
루터는 다시 비텐베르크로 돌아왔다. 그리고 주변 여러 도시들을 방문하며 설교, 교육, 논쟁을 펼쳤는데, 그 가운데 방문한 도시가 예나(Jena)였다. 기록에 의하면 루터는 예나를 11번 정도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 지도자들의 초청을 받아 설교하여 복음에 뿌리내린 믿음이 무엇인지 선포하였다. 이 도시에서 루터는 그의 지지자였던 카를쉬타트(Andreas Bodenstein aus Karlstadt)와 성찬에 관하여 논쟁을 벌였다. 성찬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종교개혁가들은 서로 양보할 수 없는 논지를 고수했고 이 때문에 서로 연합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루터는 성찬식 때 빵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고 주장한 반면, 카를쉬타트는 성찬식은 주님에 대한 신앙 고백과 그의 죽음에 대한 증거라고 이해하였다. 루터는 죄용서는 한번에 이뤄지지만 그럼에도 성찬은 계속 반복해야한다고 했다. 성찬을 주님의 실재로 이해하는 화체설에 루터는 가까웠고, 카를쉬타트는 성찬을 상징으로 이해하려했다. 이런 차이로 둘은 각기 다른 길을 가게 되었고, 1525년 스위스의 종교개혁가 쯔빙글리까지 이 논쟁에 가세하여 루터를 무신론자 또는 무례한 자라고 비난하게 되었다.
▲ 예나 시에 있는 루터 순례길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최근글


인기글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