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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도시를 가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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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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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번역의 역사가 이뤄진 바르트부르크 성
종교개혁 500주년 특집



- 아이제나흐 (바르트부르크 성)



보름스 제국의회가 마치면서 루터는 대적들에 의해 납치되었다고 알려졌다. 루터를 체포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권력자들에게는 의아스런 사건이었다. ‘우리가 모르는 어떤 이들이 루터를 납치한단 말인가?’ 로마 교황과 손잡고 있던 이들은 미궁에 빠져든 루터의 행방을 도저히 추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실상은 이렇다.
루터는 대적자들 손에 납치된 것이 아니라 안전히 어느 도시로 모셔진 것이었다. 루터 후송 작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사건은 작센공 프리드리히의 아이디어였다. 루터의 신앙 고백을 인정하고, 개혁 운동의 후견인 역할을 하던 프리드리히가 꾸며낸 일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루터를 안전한 지역으로 데려올 수 없었던 것이다.
루터는 개혁 사상을 수용한 지역의 한 도시 아이제나흐(Eisenach)로 돌아왔다. 시내에 게오르겐 교회가 있는데, 1685년 3월 바흐가 세례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루터는 이 유서깊은 교회에서 설교하며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가 무엇인지, 진정한 신앙은 어떤 것인지, 로마 교황과 가톨릭 교회의 관습 속에 얼마나 잘못된 것이 배어있는지 회중에게 선포하였다.
1521년 5월 4일 루터는 더 안전한 곳으로 이동했다. 역시 작센공의 배려에서였다. 아이제나흐 시를 감싸고 있는 산줄기에 세워진 성이었다.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으로 불렸는데 루터는 이곳에서 은둔자처럼 지냈다. 그가 침묵과 묵상, 외로움 가운데 행한 일은 기독교역사에 한 획을 긋는 작업이었다. 바로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이었다.
당시에는 모국어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일반인들은 사제들이 라틴어 성경을 읽고 들려주는 것이 전부였다. 모국어 성경 번역은 가톨릭에 의해 가혹하게 핍박을 당했다. 영국에서는 위클리프가, 체코에서는 후스가 모국어로 성경 번역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했을 정도였다. 그런 의미에서 루터의 독일어 성경 번역은 목숨을 건 행동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그 안에는 성도들이 자신의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해야 한다는 사랑의 마음이 깊이 배어있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바르트부르크에서의 역사는 이렇게 이뤄졌다.

루터가 설교한 게오르겐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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