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인물

종합.해설 분류

루터의 도시를 가다(9)

작성자 정보

  • 연합기독뉴스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 라이프치히 논쟁이 열렸던 플라이센부르크 성
종교개혁 500주년 특집

- 라이프치히


1519년 여름 루터는 가톨릭에서 파견한 신학자들과 논쟁을 벌이기 위해 라이프치히(Leipzig)로 간다. 이 도시가 자랑하는 인물로 가장 손꼽은 이는 바하(J.S.Bach)이다. 바로크 시대에서 바하를 간과한다면 과연 음악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지금까지 바하는 교회음악에서 뿐 아니라 모든 음악계에 영향을 끼친 영성 깊은 예술가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 도시 서남부에 위치한 플라이센부르크(Pleissenburg) 성에서 작센공(公) 게오르그 (턱수염이 수북하여 일명 수염공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다) 주재 아래 마이어 교수(일명 에크라고 한다), 보덴쉬타인 박사가 루터를 청문회에 부른 것이다. 논쟁은 정확하게 6월 27일부터 7월 15일까지 계속되었다. 루터를 부른 이들은 그를 굴복시키려 했지만 루터에게는 논쟁이 곧 기회였다. 루터는 교회에 대한 그의 사상을 변론하는데 온힘을 기울였다.
신학적 전투에 가까운 이 사건을 라이프치히 논쟁이라고 불리운다. 여기서 에크는 목소리를 높인다. ‘교회는 보편적 교회로서 그 전통을 가톨릭 교회가 유지하고 있다. 교회의 직분인 추기경에 의해 대표되지만 최종적으로는 교황에게서 구체화된다. 교황은 성경을 해석하고, 교회를 지키는 사도권을 가지고 있기에 무오하다, 공회 역시 무오하다.’ 이런 논리로 개혁가를 설복시키려 했다. 하지만 루터의 생각은 달랐고 확고했다. 그는 이미 여러 곳에서 쟁쟁한 신학자들과 논쟁을 벌인 뒤였고, 그런 과정을 통해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더 확실히 체득할 수 있었다. 몇몇 반대파 신학자들이나 그들과 연관된 정치인들이 굴복시키기에 종교개혁의 진리는 확실했다.
루터가 이 논쟁에서 당당할 수 있었던 점은 그가 소유한 진리가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바로 성경에서였기 때문이다. 진리는 왜곡된 전통과 역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상황 속에서도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속에 있는 것을 다시 확인하였다. 교회는 죄의 본성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죄인들이 있기 때문에, 교회는 무오할 수 없다.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교회를 변론했다.
1980년대 초 동독에서 월요기도회가 시작되었다. 1989년 월요기도회는 동독 사회주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독일의 염원인 통일을 이룩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 기도회의 중심에 니콜라이 교회가 있었고, 그 교회가 바로 라이프치히의 중심이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다.



▲ 에크와 논쟁을 벌이는 루터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최근글


인기글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