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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방송 지(址)를 보존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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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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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는 한국근대사에 있어서 귀한 사료가 되는 문화재들이 많다. 그런데 아직 문화재로 인정을 받지 못한 채 개발의 과정에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위기에 놓인 것들도 있다. 그 중 최근 남구의 개발지로 주목을 받고 있는 곳에 보존가치가 높은 일군(一群)의 건축물이 헐릴 위기에 있어 안타깝다. 그것은 극동방송이 처음 방송을 시작한 방송국 터와 건물들인데 도시개발계획에 따라서 곧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건물들과 터는 보존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 민간방송이 자유롭지 못했던 시대에 시작된 곳이기 때문에 근대사나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보존의 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1956년 12월 23일 개국당시 극동방송은 국제복음방송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 1950년대의 한국은 한 마디로 최악의 시대였다. 종전직후인지라 경제적 여건이 방송국을 만들 수 없었고, 청취할 수 있는 사람들도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때에 미국교회의 지원으로 공산권 선교를 겸한 방송을 한국의 인천에서 시작했던 것이다.

지금은 중국이나 러시아와의 국교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구소련이나 중국이 문호를 개방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극동방송은 그 지역에 자유진영의 소식을 전하는 역할을 했던 거의 유일한 방송이기도 했다. 그로 인해서 실제로 구소련, 중국, 북한지역에서 방송을 들은 청취자들로부터 많은 편지들이 왔고, 그것이 매개가 되어서 동토의 땅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극동방송 터와 건물들은 건축사적인 측면에서도 근대 건축물로서 보존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극동방송이 처음으로 전파를 발사했던 송신탑만 제외한다면 연주소를 비롯한 10여 채나 되는 건물들이 보존되어있다. 건축양식과 건축물 배치, 그리고 낮은 언덕을 그대로 이용한 집의 구조는 전형적인 서양의 주택양식이다.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배열과 조경, 건물의 독특성까지, 건축학적으로 전문적인 지식이 없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보존할 가치가 있는 건축양식임에는 분명하다.

문화재로서 보존의 가치를 말할 때 그 판단 기준에 있어서 원형이 훼손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극동방송 터와 건물들은 건축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당시의 상태를 거의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보존의 가치와 의미가 있다.
특히 고도(古都)이면서 근대사에 있어서 파란만장한 역사를 간직한 도시 인천이지만 6·25사변과 인천상륙작전의 장이 되면서 문화재들이 대부분 소실되었다. 그로 인해 변변한 역사적 현장을 찾아보기 힘든 현실에서 비록 해방 이후의 건물이지만 세월이 지나면 인천의 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히 있는 극동방송터와 건물들이기에 지금 보존하지 않는 것은 역사적 책임을 방기하는 무책임한 일이다.

인천에서 민간방송이 시작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역사이기 때문에 보존해야 한다. 극동방송이 시작하기 까지는 강태국(한국성서대학교 설립자)박사가 미국에 유학하고 있을 때 프로리다 방송국의 왓슨(Tom Watson)을 만나면서 시작되었는데, 당시 학익동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부대의 군목 볼켈(Harold Boelkel)과 인천최초의 장로교회인 제일교회 목사였던 이기혁, 당시 인천시장 이었던 김정열이 힘을 모은 결과였다.
역사와 문화재는 단지 경제논리로 보아서는 보존할 수 없다. 그러나 멀리 보면 경제적으로도 훨씬 이익이다. 유무형의 역사 문화적 유산은 가치로 환산하기 힘들만큼 큰 것이다. 유럽여행을 통해서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전쟁을 포기하면서 까지 문화재를 보존했기 그들은 지금 전 세계의 관광객들을 불러 모을 수 있게 되었다. 역사와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것은 자손대대로 정체성과 경제적 부를 물려줄 수 있는 것임을 내다볼 수 있는 안목과 지혜와 용단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이기에 인천시민과 모든 교회의 지혜를 모아 극동방송 터와 건물들을 보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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