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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산 성령운동은 한국교회 가야할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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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산 성령운동은 한국교회 가야할 길”

창간 7주년 특별좌담회 / 마리산 성령운동과 한국교회의 영성운동

 

강화 마리산 성령운동 100주년은 한국교회사적으로 매우 의미가 깊다. 이에 본지에서는 창간 7주년을 기념하여 마리산 성령운동의 100년의 역사를 되짚어 보고, 앞으로 한국교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함께 모색해 보는 시간을 갖는다<편집자 주>.

 

* 일 시 : 2015년 10월 29일(목) 오후 5시

* 장 소 : 인천제일교회

* 참석자 : 이규학 감독(인천제일교회), 박기현 목사(강화교산교회), 구본선 목사(교동교회), 이은용 장로(강화중앙교회), 한상운 장로(성일교회)

* 사 회 : 하관철 목사(문산교회)

 

하관철 목사 : 저는 2012년부터 마리산 자락에 있는 문산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교회의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데, 마침 2013년에 한상운 장로님이 강화 모든 교회에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그 내용은 “2015년도가 마리산 성령운동 100주년임을 설명하며, 마리산 성령운동이 하디 1903년- 평양 1907년- 마리산 1915년을 이어주는 한국교회의 중요한 성령운동”임을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 해 제가 속해 있는 강화남지방회는 ‘마리산 성령운동 100주년 기념 사업 준비위원회’를 구성했고 제가 준비위원장과 그 기념사업위원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올 해(2015년) 8월 달에 마리산 기도원에서 기념집회와 행사를 개최했습니다. 지나간 설명은 이 정도로 하고 이제 강화 교회사 연구자들께서 이 운동에 대해 한 말씀 해 주시지요.

 

 

구본선 목사: 하디의 회심이 원산을 넘어 평양과 서울 그리고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개인의 회심은 각 교회들의 영적변화에 영향을 준 것은 이미 아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영성운동의 기폭점은 1907년 감장 연합으로 촉발된 평양대부흥운동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평양 대부흥운동과는 별도로 강화도에서도 영적인 각성은 있었고, 교회는 부흥하고 있었습니다.

1907.4 존스 선교사 보고에 따르면, “강화지역 한 교회에서는 주일학교에 900여명, 주일 예배에는 100-200명 이상 참석했는데 그 주일날 세례받은 이들이 120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07년 4월엔 스크랜튼 선교사와 존스가 강화에 와서 강화지역 연합 사경회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1907년 또 다른 선교 보고서를 보면 “강화에 새 교회 건축이 시급하며, 강화지역의 선교사역이 대단히 번성하고 있다”는 기록이 나옴니다. 1907년 후반 강화도에는 굉장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강화도 사람 수 십 명이 목숨을 잃었고, 교인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1907년 7,8월 일본은 대한제국(조선)의 황제(고종)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까지 해산했습니다. 이 때 강화 진위대원들과 주민들이 합세해서 일본군과 무장 투쟁을 벌였습니다. 약 500여 명에 이르는 민(民) 군(軍) 연합 의병들은 갑곶나루(현재 강화대교 아래)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강화읍을 점령한 일본군은 무고한 주민 30여 명을 학살하고 죄없는 강화 주민들을 강제로 구금했습니다. 이 와중에서 강화중앙교회 교인 김동수 김남수 김영구 등 3인이 더리미 해변에서 참살을 당했습니다.

당시 내리교회 담임자였던 케이블 선교사는 “강화 사업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합니다. 강화 교회는 독자적으로 장로사 한 사람이 주재하며 일을 돌보아야 할 만큼 커졌습니다. 그러나 이는 피의 세례를 받은 결과입니다”라는 보고서를 남겼습니다.

1907년은 평양 부흥운동은 특정 지역에 국한된 사건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확산된 성령운동이었습니다. 또한 곳곳에서 의병들이 일어나 일본군과 격렬하게 맞붙어 싸웠던 시기입니다. 기독교 내에서도 성령운동만 있었던 것이 아님니다. 경기도 이천에서는 구연영.구정서 전도사 부자, 강화도에서는 김동수 권사 형제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희생했습니다.

좀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긴 하지만 1907년 강화도 교회 부흥과 의병활동 그리고 강화 교인들의 죽음은 강화도를 포함한 전국적인 현상과 비슷합니다.

 

이은용 장로: 저는 이동휘와 관련해서 강화도 부흥운동과 교육에 대해서 이야기 할려고 합니다. 이동휘는 1902년 강화 진위대장으로 부임했습니다. 그는 독립협회에서 임원으로, 서울 상동교회에서 시작된 신민회 회원으로 활동했던 민족주의자입니다. 그는 기독교에 귀의했고 ‘강화의 바울’이라고 불릴만큼 열성적인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특히 그의 관심은 학교를 설립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1904년 보창학교를 설립했습니다. 보창학교의 목표는 조국을 위해 총을 들고 싸울 독립군을 양성하는 것이었죠. 1907년 강화에는 14개의 보창학교가 있었습니다. 보창학교는 강화에만 세워진 것이 아님니다. 강화도를 포함해서 전국에 170여 개의 보창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이동휘는 1907년 강화 의병과 관련된 주모자로 몰려서 일본 경찰에 체포됨니다. 1910년엔 일본의 조선병합에 반대하다 체포되었고, 1911년엔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습니다. 1913년 이동휘는 만주(북간도)로 망명했습니다. 망명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죽었습니다.

강화의 바울 이동휘는 성령받은 사람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전도를 하고 학교를 세웠습니다. 독립운동도 했습니다.

 

한상운 장로: 저는 강화 마리산 성령운동이야 말로 1903년 원산과 1907년 평양 부흥운동의 아름다운 결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산에서는 캐나다 선교사 하디가, 평양에서는 감장 연합 그리고 미국 선교사들과 한국인 교회 지도자들이 함께 성령운동을 주도했습니다. 그런데 강화도 마리산 운동은 선교사가 아닌 한국 교인들이, 교회 목회자들이 아닌 평신도들이 주도해서 만들어간 성령운동입니다. 더구나 전국적인 파급효과가 있었다고 하지만 원산과 평양 부흥운동이 일회성으로 끝난 운동입니다. 그러나 강화 마리산 성령운동은 50년 넘게 지속되었습니다. 또한 마리산 성령운동은 단순한 개인 회개 운동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1919년 강화 삼일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길상결사대원들 – 유봉진, 조종렬, 황유부 등 - 이 마리산에서 은혜받은 성령충만파였습니다. 이들은 개인의 회심과 변화에 만족하지 않고 민족의 먼 장래를 위해서 투쟁했던 강화의 의열단입니다. 이런 역사가 쌓이고 쌓여서 1975년 현 위치에 마리산 기도원을 건축하게 된 것입니다.

 

박기현 목사: 큰 틀에서 볼 때 1915년 강화의 마리산부흥운동은 1903년 원산부흥운동과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영적 흐름의 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강화의 성령운동이 선교사가 아닌 강화의 토착교인들의 주체적인 역량으로 이루어졌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는 강화의 복음전파가 서양선교사의 직접선교에 의해서가 아니라 토착민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것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강화 복음화의 시작은 제물포에서 주막을 하던 이승환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이승환은 주막을 그만두고 고향 강화로 돌아와 어머니를 전도한 후 존스선교사에게 세례를 요청합니다. 하지만 지역의 유력한 양반가문이 땅을 밟지 못하게 반발하자 존스선교사는 이승환에게 어머니를 업고 배로 오게 하여 배 위에서 세례를 줍니다. 이 선상세례를 통해 강화에 복음의 겨자씨가 떨어집니다. 강화의 모든 교회가 강화초대교인들의 신앙유산을 계승발전 시키고자 함께 힘을 모아 노력하던 중 지난 2013년 강화 어머니교회인 저희교회가 창립 120주년을 맞으면서 [강화초대 기독교선교역사관]을 개관하게 되었습니다. 매년 1만 명 이상이 방문하고 계시는데, 강화 복음전래역사와 강화초대교인들의 아름다운 믿음을 통해 큰 도전과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하관철 목사: 저는 강화에서 목회한 지 4년 되었습니다. 강화에서 20년 이상 목회하신 분들이나, 강화 출신으로서 강화에서만 목회하다가 은퇴하신 분들에 비하면 정말 강화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감리교 지도자들의 관심이 너무 부족합니다. 마리산 기도원 내에 과거 기도원 역사에 대한 자료가 단 한건도 보관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성모관 기념비 제막식을 했는데 이에 대해 모르는 분들이 목회자들 중에도 많았습니다. 어떻든 이번 100주년 사업을 통해 어느 정도 홍보를 했다 하더라도 우리의 관심이 너무 적습니다.

 

한상운 장로: 저는 ‘마니산’ 이란 지명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하고 싶습니다. 현재 기도원 이름도 ‘마리산기도원’입니다. 그런데 행정명은 마니산입니다. 마니는 ‘마니보주’에서 나온 말로 ‘지혜의 구슬’이라는 의미를 가진 불교용어입니다. 강화 기독교인들의 성산(聖山)인 마리산이 왜 마니산으로 바뀐건지 이해할 수없습니다. 지명을 보아도 고려시대에는 ‘마리산’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마리산과 마니산이 혼용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역사성을 따져 봐도, 우리의 고유한 언어로 봐도 ‘마니’보다는 ‘마리’란 표현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마리산은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 거룩한 산입니다. 그리고 강화 기독교인들의 예수사랑, 민족 사랑이 시작된 의미있는 장소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니산보다는 마리산이 옳습니다.

 

이규학 감독: 역사를 모르고서 어떻게 발전할 수 있습니까? 또 역사가 잘못돼 있는데 어떻게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지금 사회적으로 역사교과서를 국정화 한다 혹은 그에 반대한다 논란이 일고 있는데, 우리 감리교인들도 적극적으로 역사논쟁과 역사공부에 뛰어 들어야 합니다. 강화는 교회사적으로 볼 때 세 가지 차원에서 중요합니다. 첫째 강화는 감리교 부흥운동의 본산지입니다. 감리교인과 교역자가 가장 많이 배출된 곳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고난사가 응집된 곳이기도 합니다. 외세의 침략이 들어오는 관문으로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양호 사건이 일어난 장소입니다. 그리고 중앙정부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은 곳입니다. 또한 왕족이나 귀족들의 유배지였습니다. 따라서 의식이 깨어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둘째 의식이 깨어있다는 것은 변화를 갈망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교회의 복음과 신문화를 빨리 받아들였습니다. 원산이나 평양이나 강화나 다 역사의 변방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변방은 새로운 곳이 움트는 곳입니다.

셋째 강화는 한국교회 부흥운동과 맥을 같이 합니다.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은 평신도들의 역할이 대단히 컸습니다. 특별히 감리교회가 그러합니다. 미국에서도 감리교운동은 평신도 전도자들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마리산은 한국인이 병과 가난 그리고 전쟁의 억압 속에서 복을 빌었던 곳입니다. 그런데 이 곳에 우리 감리교회의 기도처가 100년 전통을 가지고 발전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고무적입니다.

 

하관철 목사 : 강화 교회에 대한 폭넓은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강화 교회의 전통, 그리고 마리산 성령운동의 전통은 21세기 오늘의 시대에 어떤 모습으로 발전될 수 있을까요?

 

박기현 목사: 강화의 복음전래 역사 속에는 스토리텔링 형식의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녹아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주막주인 이승환과 그 어머니의 선상세례 이야기를 비롯해서, 강화복음화의 초석이 된 김초시 양반의 개종과 순직에 얽힌 이야기며 강화의 두 번째 교회인 홍의교회를 개척한 박능일의 개종이야기 등이 그렇습니다.

또한 강화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민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마리산 부흥운동 또한 어려운 시절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했던 민족적 신앙의 좋은 본보기입니다. 부흥회를 마친 교인들이 각기 돌을 지거나 이고 마리산에 올라가 제단을 쌓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한 것은 강화교인들의 나라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강화교인들은 복음을 삶 속에서 그대로 살아낸 ‘실천적 영성’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종순일의 ‘빚 탕감 사건’과 김씨 부인의 ‘노비 해방 사건’입니다. 홍의마을의 종순일은 마태복음 18장의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았으면서 백 데나리온의 빚을 안 갚는다고 옥에 가두었다가 저주받은 악한 종의 이야기를 읽고 자기 집의 소작인들이 진 빚 문서를 불태우고 빚을 다 탕감해 주었고, 강화읍의 김씨 부인은 자기가 부리던 여종을 해방시켜 수양딸로 삼았습니다. 이런 일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사건이었고 강화주민들에게 기독교는 자유와 해방을 주는 종교라고 받아 들여 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강화초대교인들의 이런 아름다운 신앙유산을 계승 발전시켜서 제2, 제3의 영적부흥이 이뤄지기를 소망 합니다.

 

이은용 장로: 저희 강화중앙교회는 현관을 역사전시관으로 꾸며 놓았습니다. 대단한 것은 아지만 그래도 교회를 방문한 분들에게 다양한 사진과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는 자부심은 있습니다. 사실 저희 교회야 말로 역사적인 인물들이 많은 교회입니다. 강화의 바울로 불린 이동휘 권사, 1907년 더리미에서 순국한 김동수 권사 형제들,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 장관을 역임한 조봉암 선생, 6.25때 순교한 백학신 감리사. 1902년 감리교가 파송한 첫 해외 선교사였던 홍승하 목사가 강화중앙교회에서 배출된 감리교 인물입니다.

1년동안 강화도를 방문하는 관광객이 약 300만 명입니다. 이 중에는 교인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1%라고 해도 3만 명 이상의 기독교인들이 강화를 방문할 것입니다. 교산교회를 방문하는 분들이 1만 명 이상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강화를 방문하는 기독교인들에게 강화 기독교의 역사와 민족운동, 성령운동을 체계적으로 설명해 주는 분들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강화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도 이런 문제들을 고민하고 있지만 같이 활동할 일꾼이 부족합니다. 기독교방송국(CBS방송)에서 기독교 역사 해설사를 양성한다하고 하는데 강화 지역에서도 ‘강화 기독교 역사 해설사’를 양성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규학 감독:우리 한국교회는 5번의 부흥을 가졌는데, 모두 고난의 역사에서 부흥이 되었습니다. 강화의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3.1 만세 운동을 통해서 크게 부흥이 되었는데 당시 강화 삼일운동에 모인 숫자가 일 만 명에 달합니다. 유관순을 중심한 운동에 모인 인원 2,000명에 비해서 엄청난 숫자입니다.

조봉암 같은 분은 삼일운동을 통해 크게 부각되어 훗날 이승만 정권에서 토지개혁을 주도했습니다. 성서가치를 대한민국 정치에 현실화한 놀라운 사건입니다. 또한 육이오 당시 피난민의 신분이 보장이 되지 않을 때 목사가 신분보장 사인을 하면 다 인정받았습니다. 우리 근대사의 선각자 중에 교회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 교회의 역사가 국사 교과서에서 사라졌습니다. 누구를 탓할 것이 아니라 먼저 교회 교육 현장에서 스토리텔링을 통해서든 역사 재해석을 통해서든 혹은 성지화를 통해서든 한국 기독교 역사를 부활시켜 교회의 발전으로 연결해야 합니다.

 

윤용상 국장: 오늘 많은 얘기를 했습니다. 긴 시간 여러 분들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한 분 한 분에 맞춰서 정리해보았습니다. 강화 마리산 성령운동에 대해서, 강화 기독교 뿐 아니라 한국 교회의 미래에 대한 고민도 함께 나눠보았습니다. 지나온 100년은 우리들의 이야기꺼리였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우리 한국교회가 걸어가야 할 100년은 말 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알 수없으니 말 할 수없고, 겪어본 적이 없으니 더 말 할 수없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이지만 과거를 통해서 해답의 실마리를 얻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부끄러움없는 100년을 살아갈 것입니다. 오랜 시간 함께 해 주신 목사님들과 장로님들께 감사를 드림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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