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인물

종합.해설 분류

루터의 도시를 가다(17)

작성자 정보

  • 연합기독뉴스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종교개혁 500주년 특집

- 비텐베르크에서의 결혼(III)


루터는 자신의 삶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보라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늦은 밤 학생이 문을 두드렸다. 몹시 당황하는 목소리에 루터라는 말이 어렴풋이 들렸다. “루터 선생님이 아파요. 보라, 보라! 도와주세요.” 보라는 수녀원에 있을 때 산과 들로 나가 약초를 캐어 생약을 달이는 기술을 습득했었다. 사람들은 보라를 의원처럼 여기고 있던 차였다. 보라는 땀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루터에게 정성스레 고른 약초를 다려 마시게 했다. 배를 움켜쥐며 잠을 이루지 못하던 루터는 고요히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침대 옆에서 병상을 지키고 있던 보라는 그만 고개를 떨구고 잠에 떨어졌다. 횃불이 방안에 어른거렸다.
보라는 문득 인기척을 느꼈다. 고개를 들고 보니 루터가 일어나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루터는 보라가 잠에서 깬 듯 하자 그녀의 손을 잡았다. 둘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루터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보라는 알 것 같았다. 보라의 눈빛은 루터를 다른 어느 때와는 다른 감정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1525년 6월 13일, 루터와 보라는 드디어 결혼예식을 올렸다. 비텐베르크는 축제의 분위기에 싸였다.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이고 자유를 얻은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다. 루터와 보라의 결혼은 가정의 신성함을 가르치는 계기가 되었다. 가정은 하나님이 맺어주신 사랑의 공동체였다. 가정은 부부의 사랑이 그 모태요 거룩한 삶이 깃드는 곳이었다. 가정은 그리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을 시작하는 출발의 장소였다. 루터와 보라의 결혼은 사람들로 하여금 가정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모범이 되었다.
하지만 비텐베르크 성 밖, 종교개혁을 반대하는 이들은 이 결혼식을 불경스런 신성모독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들에게 루터는 파계한 수도승이라면, 보라는 수녀원을 탈출한 마녀라는 것이다. 로마교황이 공개적으로 파문한 이들의 결혼이 신성하다고 추켜세울 리는 없었다. 반대파들에게 모진 공격을 받았지만 루터와 보라의 결혼은 종교개혁 과정에서 또 다른 의미를 세우는 거사중 하나였다.
가정은 복음 안에서 자유한 이들이 복음 안에서 함께 선행을 이루어가기 위해 세우신 하나님의 섭리라는 깨달음이다. 루터는 결혼하게 되므로 개혁을 위하여 더욱 매진할 수 있었다. 보라가 개혁가의 살림을 도맡아 일상의 염려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결혼은 서로에게 새로운 자유를 선사하는 은혜의 통로였던 것이다.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최근글


인기글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