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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hua 리” 의 12월 캄보디아 선교 이야기
2014년 12월 18일 (목) 15:58:31 연합기독뉴스 webmaster@ycnnews.co.kr

“Joshua 리” 의 12월 캄보디아 선교 이야기

 

“연합기독뉴스” 독자 여러분, 그간도 주님 은혜 속에 안녕하신지요? 12월 선교이야기 두 번째 펜을 듭니다. 캄보디아는 우리 대한민국보다 기독교 문화가 훨씬 먼저 들어 온 나라입니다. 크메르 문명이 절정을 이루던 12-14세기 이후 불교가 힌두교 바탕을 둔 국가 위계질서를 허물기 시작하자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해 확장되던 크메르 문명은 급격히 쇠퇴하여 15세기에 이르러서는 크메르인들은 더 이상 수도 앙코르를 방어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후 400년 동안은 정치적, 사회적인이 쇠퇴기를 맞았고, 베트남과 시암(타이 북부)과의 잦은 전쟁으로 여러 차례 크메르 왕들은 이 나라 저 나라의 봉신(封臣)이 되었습니다.

이러던 중 1864년 프랑스의 보호국이 됨으로써 크메르의 정치적인 안정이 회복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 캄보디아는 프랑스 연방 내의 한 자치국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캄보디아는 자연적으로 프랑스 문화에 젖어 들어 기독교적 문화도 자연스럽게 프랑스인들에 의해 접목 되었습니다. 그러나 캄보디아는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시대적 상황적 여러 원인이 있습니다. 그 중 정치적 혼돈이 큰 몫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1975년 캄보디아를 장악한 크메르루즈, 폴 포트 공산 정권은 교육받은 지식인과 중산 계급에 속하는 선의의 국민들을 정부의 적으로 보아 1979년까지 크메르루즈군대의 조직적인 소탕 작전으로 최소한 100만 명(민간에선 약 200만 명을 추산)의 캄보디아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리고 도시민들을 농촌 지역으로 강제 이동시켰고, 광대한 정부 공공 토목 공사에 국민들을 강제 노동으로 내몰았습니다. 이때 국민들의 생활은 극한 가난과 열악한 생활환경 등으로 굶주림과 질병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호전적인 크메르루즈는 이웃 나라 베트남과도 전쟁으로 결국엔 수세에 몰리게 되자 크메르루즈에서 이탈자가 나오면서 이들에 의한 작은 정부가 세워지고, 베트남이 지원하는 정부측도 생기고, 왕정주의자 및 반공주의자가 생기면서 여러 파벌 간에 분쟁은 끊임없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1991년 UN의 보호하에 대부분의 캄보디아 파벌 당사자들이 참여한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고, 1993년 UN감독 하에 과도정부 자유선거를 실시했고, 이어 시아누크 국왕이 군주의 지위에 복귀 연립정부를 이끌면서 그간의 캄보디아 내전은 종식되어 갔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정치적 상황으로 국민들의 삶은 피폐하여 쌀농사 외에는 그 어느 것도 삶의 안정과 경제적인 호전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정부가 기울인 국가 재건의 노력에 자력으로는 그 어떤 것도 해결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외국의 원조도 턱없이 부족했고, 숙련된 기술자, 전문가의 부족으로 나라는 온통 극심한 어려움뿐이었습니다.

 

1993년 UN감독 하에 과도정부 자유선거 이후 각국의 원조가 들어가기 시작하면서부터, 기독교의 선교적 영향도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루 벌어 한 끼니 해결도 어려운 상황에서 편안하게 성경을 배우고 예배를 드린다는 정상적인 기독교적 신앙의 삶은 먼 이야기, 남의 나라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이런 면은 여전합니다. 지금도 농촌 오지 지역에선 한 끼니 해결도 어려운 실정입니다. 이런 정서에 “예수 믿으세요!” 라는 말은 먹혀들어 가지 않습니다. 더욱이 수천 년 조상적부터 힌두교에서 불교로 이어 온 민속신앙은 캄보디아인들에게 있어서 어머니 품, 또는 삶의 실체(존)로 자리 매김 되어 온 부분입니다.

 

이러한 캄보디아를 기독교가 생활화 된 유럽 선진국의 프랑스가 근대로 넘어 오면서 캄보디아를 약 100년 동안 보호 통치 하여 왔고, 현대 기독교 선교 역사 3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정착 배가는 둘째 치고라도 토착화도 아직 뿌리 내리지 못한 실정입니다. 그러나 그동안 뿌린 복음의 씨앗과 사회 간접 시설 원조 등으로 아주 미미하게 조금씩 토착화가 이루어져 성경학교, 신학교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가난을 해결 받고자 하는 차원에서의 사역(목회)자가 되려는 정서가 성경학교와 신학교 문을 두드리는 이들에게 있음에 역시 안타까운 사안입니다.

 

- 다음 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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