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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피에타’의 기독교적 해석
2012년 09월 27일 (목) 10:29:17 연합기독뉴스 webmaster@ycnnews.co.kr
   

‘쓰레기’ 속에서 건져올리는 영화신학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 수상과 함께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지난 6일 개봉했다. '피에타'는 이탈리어어(Pieta)로 '신이여, 자비를 베푸소서'란 뜻으로 슬픔, 비탄을 뜻하는 말이다. 영화 피에타는 '자비를 베푸소서'란 뜻처럼 가족도 없고 사랑받아 본 적도 없는 남자주인공 강도의 슬픔의 캐릭터와 대비되며 더욱 부각되고 있다. 기독교문화운동가 추태화 교수(안양대 기독교문화학과)가 영화 ‘피에타’ 속에서 나타내고 있는 내용을 기독교적 해석으로 내놓았다.<편집자 주>

불편한 사나이의 불편한 영화
‘김기덕’이 감독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상상은 이렇게 날아간다. “또 무슨 이야기로 우리를 불편하게 할까.” 18세 빨간 딱지가 붙은 것만 해도 상식에 충격을 주는 그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채업자 이강도(이정진 분)가 등장하고, 그는 직업대로 매몰차게 작업에 들어간다. 사채 빌려 쓴 자들은 극악무도한 강도를 두고 ‘쓰레기’라고 저주하지만, 강도는 빚쟁이들을 도리어 ‘쓰레기’라고 맞장구친다. 그렇다. 앵글은 밝고 환한 서울을 잡는 게 아니다.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경제대국 대한민국, 그 화려한 수사학을 뒤로하고, 서울의 뒷골목, 쓰레기 같은 청계천의 안쪽을 후빈다. 하고많은 서울의 양지를 두고서 왜 그는 불편한 곳으로 관객을 초대하는 것일까.
청계천은 과거 한동안 ‘쓰레기’의 대명사였다. 평화시장, 봉제공장, 인쇄소, 철공소들이 군집한 곳, 철공소에는 공돌이들이, 봉제실에는 공순이들이 닥지닥지 닭장처럼 만들어진 공간 속에서 신음하며 일하던 시절이 있었다. 전태일 열사를 낳은 대지이기도 하다. 왜 불편한 공간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여 불편하게 하는가.

돈, 자본주의의 꽃 또는 괴물
자본주의와 돈, 여기에 기생하는 쓰레기들에 대한 이야기로는 최근에 <타짜> <쩐의 전쟁> <돈의 맛> 등이 적나라하게 실상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피에타>는 다르게 접근한다. 청계천의 그늘을 다룬 다큐멘터리 같기도 하고, 묘사의 군더더기가 없이 리얼리즘 기법으로 만든 영화이기도 하고, 감독은 서울의 진면목, 수도의 화려함 속에 가려진 ‘쓰레기’가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 곧 돈의 인페르노라고 본 것은 아닌지. 여기에서 인간은 철저히 소외된다.
소시민들은 괴물의 힘을 막을 재간이 없다. 살인적 고리(高利)에 저항할 방법이 없어 온몸으로 돌진한다. 아내는 남편의 불구를 막기 위해 몸을 주기도 하는데 강도는 매몰차게 자신의 업무를 진행한다. 아무도 그들에게 말해주지 않는 자본주의의 비정한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과연 쓰레기 같은 인간들의 쓰레기 같은 세상에 구원이 필요할까. 구원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할렐루야 vs. 피에타
두 개 단어가 교차된다. 하나는 할렐루야이고, 하나는 피에타이다. 전자는 기쁨과 찬양의 소리라면, 후자는 슬픔과 비탄의 소리이다. 교회사적으로도 피에타가 부각되는 고난의 절기에는 할렐루야를 소리 내어 외치지 않는다. 그만큼 상극적인 영성이 깃들어 있다. 구원은 어떻게 다가오는가?
역설적이게도 강도의 구원은 거짓말에서 시작된다. 그의 엄마라고 나타난 여인(조민수 분)은 실상 가짜였다. 강도에 의해 자살로 내몰린 철공소 젊은 사장의 어머니였다. 엄마는 아들의 복수를 위해 가장(假裝)한 것이다. 냉혈인간 강도는 그러나 반신반의하면서 잃어버린 과거로 다시 돌아가려 한다. 가짜 엄마가 노린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강도에게 당한 아들의 고통을 그대로 되갚아주기 위해서는 강도가 냉혈인간으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가 따스한 인간의 감정을 지닌 인간으로 되돌아가야 고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는 이중적이 된다. 자신의 친아들의 복수를 위해 원수의 엄마가 되어야 하고, 복수를 위해 원수를 다시 인간으로 변화시켜야 했다. 여기서 비극적 패러독스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복수는 곧 구원
강도의 엄마가 아들의 원수를 갚는 과정은 역설적이게도 강도에게는 구원의 시작이 된다. 강도는 그동안 괴물의 지배 아래 있었다. 그의 신음은 누구도 치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엄마의 복수는 그에게 치유의 근원이 되었다. 쓰레기 같은 인생 한 장면에서 복수와 구원은 그렇게 만난다.
자, 강도는 서서히 다시 사람이 되어간다. 그와 함께 자신에게 상해를 입었던 이들을 찾아다니며 그 실상을 보며, 자신이 행했던 일이 얼마나 죄악된 것이었는지 반성한다. 회심의 기미가 엿보이는 것이다. 그 뒤 그의 삶은 변화가 찾아온다. 먹구름 가운데 한 줄기 빛이 새어 들어온다.
그러나 엄마마저 다른 엄마의 복수에 의해 목숨을 잃자 속죄만이 자신이 행할 수 있는 마지막 행동이라 여긴다. 그것은 거의 무의식에서 부르짖는 절규였다. 그는 엄마에 의해 속죄를 생각할 만큼 인간이 되어갔다. 인간이 되라. 그래야 속죄가 속죄다워진다. 속죄의 조건은 인간이 되는 길이다.

‘피에타’ 혹은 영화신학
어머니도 철혈피 강도만큼 만만치 않다. 악마 같은 사람을 인간이 되게 하고, 고통을 느끼게 하므로 복수하는 어머니가 아니었던가. 그 어머니는 어머니에 의해 추락사하고 만다. 철공소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또 다른 어머니를 복수의 희생양으로 삼고 만다. 복수의 악순환이다.
강도는 엄마가 짜던 쉐터가 자신의 것인 줄 알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엄마를 묻기 위해 땅을 파는 순간 그곳에서 엄마의 친아들 주검이 나타나고, 그가 그 쉐터를 입고 있지 않은가. 자신이 죽음으로 몰고 간 젊은이의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어머니 옆에 하나는 죽은 친아들이, 다른 한편에는 자포자기한 강도가 누워있다.
마리아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자신의 아들을 안고 있었다. 극도의 슬픔, 처절한 아픔 속에 구원의 틈새가 보여지고 있다. 엄마는 죽은 아들과 죽인 아들을 모두 품에 안고 있다. 말로 설명해 보일 수 없는 인간 상황, 쓰레기 같은 현실, 바로 죄의 적나라한 실상, 부조리한 세계의 실존이었다. 그러니 거기서 울부짖지 않을 수 없다. 언어가 끝나고, 의식의 초점이 흐려지는 그 시각에 할 수 있는 마지막 절규는....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신은 불가사의하시다. 열등감의 괴물이라던 ‘김기덕’을 통해 구원을 말씀하시다니.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무엇일까. 강도의 속죄이다. 그는 자신이 파탄에 이르게 한 가정의 생계수단인 포터에 몸을 매단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여인은 차를 몰고 생업의 현장으로 달려가는데, 그 밑에선 강도가 피를 흘리며 죽어간다. 여인은 강도가 흘리는 피 한 방울 한 방울에서 속죄의 피를 보상받고, 강도는 한 방울 한 방울 피를 쏟으며 속죄의 길을 간다.
죄가 지배하는 세상은 거의 쓰레기이다. 하지만 쓰레기 같은 세상에서도 사람들은 구원을 향해 몸부림친다. 구원을 받으려면 먼저 인간의 아픔을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래도 구원이 멀어 보일 땐, 이렇게 절규한다. 피에타,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인간은 쓰레기 같은 현실에 무릎 꿇는다. 구원은 그래도 멀리 있지 않다. 이렇게 부르짖는다면.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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