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들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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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아의 아버지- 소다 가이찌
2011년 07월 27일 (수) 13:15:57 박경진 장로 kj4063@hanmail.net
   
▲ 소다 가이치
이땅을 위해 헌신했던 많은 선교사들이 묻혀있는 양화진외국인묘지에 안장된 유일한 일본인이 있다. 바로 소다 가이찌(曾田 嘉伊智, 1867-1962)와 그의 부인 우에노(上野, 1878-1950)이다.
소다 가이찌는 1867년 일본 남서부 야마구찌 현에서 출생하였다. 21세 때 고향을 떠나 일찍 개항된 나가사키로 가서 탄광에서 일하며 초등교사 자격증을 얻어 교사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25세 때 노르웨이 화물선 선원이 되어 홍콩에 가 영어를 익혔고, 청일전쟁으로 일본이 승리하여 대만이 일본 식민지가 되자 그곳에서 독일인이 경영하는 공장에서 일했다. 1899년 어느 날, 술에 취해 길에 쓰러져 있는 그를 한 조선인 청년이 근처 여관에 데려다 주고 여관비까지 지불해 주었다. 이 인연으로 1905년 한국에 와서 서울YMCA의 전신인 황성기독교청년회 학관에 일본어 교사로 취직하였고, 여기서 종교부 총무 월남 이상재를 만나 그에게 깊은 감화를 받아 기독교를 접한다. 그리고 일본인 초등학교인 히노데소학교(일신초등학교의 전신) 교사이자, 숙명여고와 이화여고에서 영어교사를 하고 있던 독실한 기독교 신자 우에노 다끼(上野, 1878-1950)와 결혼을 하게 되면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마침내 소다는 YMCA 일어 교사직을 관두고 일본인 경성감리교회 전도사가 되어 매서인을 겸하며 복음전도에 투신한다.

그러던 중 한일병탄 소식을 접한 소다는 일제의 무단정치에 분노하였다. 그는 105인 사건을 조작했던 데라우찌 총독과 일본인 경성기독교회(해방 후 덕수교회) 장로인 대법원장 와다나베를 찾아가 "죄 없는 조선사람을 즉시 석방하라"고 항의하기도 하였다. 이 일로 소다는 일본인 사회에서 배신자란 말을, 조선인으로부터는 스파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으나, 변함없이 조선인과 조선 교회를 사랑했다. 이것이 일본 교계에 알려져 중구 회현동에 일본인 메도디스트처치(현, 강남 반포동 남산교회)가 설립되어 무보수 전도사로 사역하게 되었고 전국적으로 일본인을 상대로 교회들이 많이 설립되었다.

   
▲ 우에노 다끼 여사
한편 1921년 소다 가이찌 부부는 고아사업기관인 일본 가마꾸라(鎌倉) 본부로부터 경성지부 책임자로 임명받았다. 이들은 가마꾸라보육원(현 영락보린원)에서 조선인 고아들과 함께 생활하며 정성껏 돌보아 "소다는 하늘의 할아버지, 우에노는 하늘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얻었다. 고아원이 경제난으로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을 때, "소다 선생 내외분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업입니다. 우리나라 동포를 대신하여 감사드립니다."라는 익명의 편지와 거금 1천 원이 마당에 놓여있었다고 한다. 또 어느 날은, 일본헌병대가 고아들에게 항일교육을 했다며 소다를 체포하였는데, 그가 돌본 고아가 독립투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알고 그는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이뿐 아니라 3.1운동으로 그가 존경하던 이상재 선생과 YMCA의 지도자들이 투옥되자 소다는 대법원장을 찾아가 이들의 석방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943년 원산의 일본인 교회에 교역자가 없어 소다 전도사가 무보수로 가게 되었다. 그의 나이 77세 때였다. 서울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는 부인과 떨어져 원산에서 자취하며 목회하였다. 그 후 조선은 해방을 맞이하고 1947년 소다는 일본으로 귀국하여 "오 하나님, 인류가 범한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하고 다녔다. 부인 우에노 여사는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서울에 남아 있다가 1950년 1월 74세로 한국에서 별세하였다. 소다는 부인의 죽음에 대해 "그녀는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봉사의 생애를 마쳤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아니 그의 영혼은 늙은 남편과 같이 여행하면서 힘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는 나대신 한국 땅에 묻혔습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한국사회사업연합회 주관으로 거행된 부인의 장례식 후 소다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계속해서 일본인 회개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늘 한국으로 가고 싶어 하는 그의 사정을 알게 된 일본 아사히신문사와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의 주선으로 1961년 내한하여 영락보린원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62년 3월28일 95세의 나이로 한국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사회단체연합장으로 2천여 조객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회당(의사당)에서 거행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일본인에게 처음으로 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 선교사 기념비

이처럼 소다 가이찌를 서울 YMCA 교사로, 원산교회 전도사로, 가마꾸라 보육원장으로 40년간을 한국에서 살며 수천 명의 고아들의 아버지가 되게 한 최초의 한 사람은 무명의 조선인 청년이었다. 우리 역시 만나게 되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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