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들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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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초대 총장- 용재(庸齋) 백낙준 박사
2011년 07월 21일 (목) 10:13:54 박경진 장로 kj4063@hanmail.net
   
▲ 백낙준 박사
백낙준(白樂濬, 1895~1985)은 한말의 격변기인 1895년 평북 정주군 관주면에서 농부 백영순(白永淳)의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교육을 받았으며, 1906년 미션스쿨인 영창학교에 입학하여 기독교와 신학문을 배운다. 이곳에서 나라의 역사에 눈을 뜨게 되지만, 이 시기 부모를 여의고 또 나라마저 빼앗기는 슬픔을 겪는다. 이후 미국 선교사인 맥큔(G.S. McCune 한국명: 윤산온) 교장이 선교사들의 집에서 일을 하며 학비를 마련할 수 있게 해 주어 선천의 신성학교에 가게 된다.

하루는 미국 선교사가 소년 낙준에게 뒤뜰에 가서 장작을 좀 패라고 하고는 시골 교회 순회를 나갔다. 저녁 10시쯤 되어 돌아왔는데 뒤뜰에서 장작 패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서 가보니 낙준 학생이 어둠 속에서 장작을 패고 있었다. “왜 지금까지 장작을 패고 있느냐?”고 물으니 낙준은, “장작을 패라고 하셨지 언제까지라고는 하지 않아서 돌아오실 때까지 패고 있었다.”고 대답했다. 이 말에 깊은 감동을 받은 선교사는 그의 손을 잡고 "너는 커서 훌륭하게 될 수 있다. 너를 미국에 가서 공부할 수 있게 주선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한편 신성중학교 시절인 1911년 10월, '조선 초대총독 데라우치 암살미수사건'(105인 사건)으로 이 학교의 교원과 학생들이 다수 체포되었다. 그 역시 검거를 피해 다니다가 1913년에 겨우 졸업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영국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천진의 신학서원에 입학하여 영어와 성경, 그리고 동양의 고전을 익혔다. 이때 실학자 정약용의 저서에서 얻어낸 '용재(庸齋)'라는 아호를 쓰게 된다. 이후 백낙준은, '바꾸지 않는다.' '보통이다.' '실용적, 응용해서 쓰인다.'는 뜻에, '용렬하다'는 뜻을 담고 있는 이 아호의 뜻대로 살고자 평생을 노력하였다. 3년 후에는 미국으로 가서 맥큔의 모교인 파크대학에서 역사학 학사 학위,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신학사 학위, 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정치외교학과, 도서관학을 이수하였다. 1927년 예일대학에서 ‘한국개신교회사연구’로 ‘한국인 제1호의 박사학위’를 받는다. 지도교수 라두렐은 “당신과 같은 제자를 둔 것이 내겐 영광이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 미국에서 세례를 받아 공식적으로 기독교인이 된다.
   

백낙준은 14년의 유학의 길을 접고 1927년 여름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에서 성경 과목을 가르치게 된다. ‘조지 백(George Paik)’이라는 영문 이름도 사용한다. 이듬해 문과과장에 취임한 그는 문과과정 안에 최현배의 ‘조선어’를 선택과목으로 설정하였고, 자신의 동양사 과목 안에 한국사를 포함하였으며, 정인보의 한문시간에 국문학을 강의하게 하는 등, 위험을 무릅쓰고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한편 1930년 36세의 늦은 나이에 제자 최이권(崔以權)과 결혼하여 슬하에 4형제를 둔다.
그러나 그가 잠시 외국에 있는 동안 사회운동단체인 수양동우회사건에 연루되어 귀국하지 못하다가 1939년 귀국 직후 종로경찰서에 끌려가 사직서를 쓰고 연희전문학교 교수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1942년 9월에는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소환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한편 조국해방과 더불어 백낙준은 1945년 연희대학교장으로 취임하면서 다시금 교육계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친다. 광복 이후 연희전문학교는 연희대학교가 되고, 뒤이어 세브란스의과대학교와 합하여 연세대학교가 된다. 이 과정에 백낙준은 중심에 있었다. 미군정 때 발족한 한국교육심의회에서는 그가 교육이념으로 제안한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건국이념이 한국교육이념으로 채택되기도 하였다. 또한 1950년 5월 문교부 장관에 취임하였으나 곧바로 6·25전쟁을 맞는다. 그는 한국전쟁 중의 교육문제 해결에 진력하였으며, 전쟁 직후의 잿더미 위에서도 중단 없이 학교수업을 받게 하였다. 4·19혁명 후에는 참의원 의장으로 잠시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기도 했으나 5·16군사정변과 함께 참의원이 폐원되는 바람에 그의 정치무대도 사라지고 말았다. 이때를 제외하고는 1960년까지 연세대의 총장직을 무려 16년간 맡았다. 1970년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 받았다. 백낙준은 1985년 1월 13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세브란스병원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연세대학교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진리와 자유의 뜻을 따라 겨레와 인류에 이바지할 사람을 가르치기 위하여" 세워진 곳이다. 백낙준은 이곳을 ‘거룩한 땅’이라 하였다. 연세대학교의 교육과학대학인 '용재관'은 그의 호를 딴 것이다. 백낙준 박사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의 혼란한 조국의 현실을 직시하고 민족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기독교'를 통해 이상을 제시하고 '교육'을 통해 그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던 민족교육의 선각자였다. 그가 간파했듯이, 초기 한국기독교는 사람을 새롭게 하고 민족을 새롭게 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교회는 스스로 정화할 능력조차 잃어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이제 한국교회가 역동성을 가지고 나라와 민족의 앞날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백낙준 박사가 품었던 기독교 신앙의 힘과 생명력을 다시금 되살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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