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들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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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보수 자비량으로 교회를 섬긴 이덕봉 장로의 순교이야기
2011년 01월 26일 (수) 11:15:01 박경진 장로 kj4063@hanmail.net
   
▲ 이덕봉 장로(1900~1950)
1902년에 20대의 미혼 청년 선교사로 한국에 온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맥쿠첸(Rev .L.O. McCutchen 1875-1960, 한국명: 마로덕)은 전주선교부에 소속되어 전라북도 지역 선교에 크게 공헌하였다. 서울에서 어학교육을 받은 뒤 1903년 전주에 와서 일제 말기 강제추방령으로 한국을 떠난 1941년까지 38년 동안 전북지방에 복음을 전하고,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며 헌신적으로 사역했다.
마로덕 선교사는 전주선교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던 금산지역(현, 충남 금산)과 익산군 동부 일부 지역을 맡았다. 넓은 지역을 혼자 감당할 수 없어서 전주선교부를 통해 전주 성경학교를 설립하고 전도사를 양성하였는데,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덕봉(李德奉, 1900-1950)이다.

금산지방에 처음으로 복음이 전해지게 된 것은 충남 논산에 있던 미 감리교 청년전도대가 금산읍을 드나들면서부터였다. 이때 기독교를 접한 이경필은 마로덕 선교사와 그의 조사 최대진과 동행하며 금산 읍내에서 7명의 신자를 얻었고, 임시예배처소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금산읍교회(현, 금산제일교회)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마로덕 선교사는 교회 내에 심광학교를 설립하고 근대교육을 실시하였다.
한편 일찍 부친을 여읜 이덕봉은 숙부 이춘원의 전도를 받고 어머니와 함께 금산읍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이때 이덕봉을 눈여겨본 마로덕 선교사는 그가 심광학교를 졸업하자 전주 선교부에서 설립한 전주 신흥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전주 신흥학교 중등과를 졸업하자 마로덕 선교사는 이덕봉을 장차 목회자로 키우고자 자신이 운영하는 전주성경학교에 진학시켰다. 이덕봉은 방학이 되면 고향 교회에 와서 집안일을 돕는 한편, 성경학교 학생들과 하기학교 봉사팀을 만들어 금산군 일대와 무주군에 속한 교회까지 다니면서 봉사활동을 하였다.
어느덧 이덕봉은 성경학교 3년 과정까지 다 이수하였다. 하루는 마로덕 선교사가 그를 집으로 초청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평양신학교에 진학하여 목회자로 자신과 함께 전북지방 교회에서 사역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이덕봉은 인삼밭을 운영해서 평양신학교에 재학 중인 숙부 이춘원과 조카 이재봉의 학비를 충당해야 한다면서 제의를 거절하고 평양신학교 진학을 포기하였다.

이후 이덕봉은 조사로 임명 받고 금산읍교회를 비롯해서 부림교회, 금성교회, 내밀교회를 돌보면서 목회하였다. 특히 역평교회 예배당은 그가 직접 설계하였을 뿐 아니라, 건축과정에서도 자신이 집에서 키우던 소를 팔고, 직접 경작한 인삼밭에서 난 인삼도 팔아서 건축 경비에 보태서 예배당을 완공하였다. 이렇게 건립한 역평교회에서 이덕봉은 장로로 피택되어 당회장 마로덕 선교사의 집례로 장로 장립을 받았다.

한편 1938년 신사참배 반대 문제로 이덕봉의 모교인 전주 신흥학교를 비롯하여 미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설립한 학교들이 모두 폐쇄되었고 1940년 마로덕 선교사 등 선교사들이 모두 철수하였다. 그리고 미 남장로교 선교부의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은 교역자들은 일본의 강요에 신사참배를 하면서 교회를 맡을 수 없다는 교역자가 속출하였다. 이같이 교역자가 부족할 때 이덕봉 장로는 수영리교회의 청빙을 받고 무보수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한편 이덕봉은 인삼재배 수입으로 생활하고 십일조를 성실히 하며 가난한 교인들에게 나누고 베푸는 일에도 정성을 다하였다. 이로부터 신기하게도 그의 인삼밭에서는 질 높은 인삼이 재배된다는 소문이 돌면서 장날이면 이덕봉 장로 밭에서 나온 인삼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삶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그의 설교는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과 은혜를 끼치게 되었다.

그의 설교 가운데서 “우상을 숭배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흔들림 없는 확신을 가졌던 그였기에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감격은 누구보다 컸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6.25전쟁이 발발하였다. 이덕봉 장로는 전쟁 중에도 교회를 떠날 수 없었다. 이에 인민군은 이덕봉 장로가 있는 수영리교회 사택을 급습하여 체포하고, 마로덕 선교사의 앞잡이였다는 죄목으로 인민재판에 회부하였다. 이덕봉 장로의 구제 사업으로 은혜를 입었던 이들이 백방으로 구명운동에 힘썼지만 잔악무도한 공산당의 총칼 앞에서도 신앙을 굽히지 않던 그는 1950년 9월22일 수십 개의 죽창으로 온몸에 찔려 순교를 당하였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순교자의 피로 지켜져 왔다. 그리스도인들은 순교자적인 신앙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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