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들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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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론 성지와 황사영
2017년 07월 19일 (수) 10:47:35 연합기독뉴스 webmaster@ycnnews.co.kr

배론 성지와 황사영

 

 

 

우리나라에는 많은 기독교 성지가 있다. 조선 후기 많은 순교자를 낳았던 천주교에 많은 성지가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물론 개신교에도 일제시대와 6.25를 거치면서 많은 순교자를 낳았고 관련 성지들이 있다.

한국에는 많은 천주교 성인들이 있으며 몇 차례 성인 시복식이 있었다. 19세기 초 조선에서 가톨릭 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본격화된 후 이 종교를 위해 목숨 바친 순교자는 100년간 최대 3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국 천주교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 순간인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 앞에서 거행되었다. 광화문 광장은 조선시대 의금부, 포도청, 서소문 형장 등 한국 제1세대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친 장소들과 밀접하게 연결된 곳이다. 이날 순교자 124위 시복식은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네 번째로 열리는 시복식이었다. 앞서 일제 강점기인 1925년(79위)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직후인 1968년(24위)에 열린 시복식은 모두 로마에서 열렸다. 또한 순교자 103위는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한국에 직접 방문하여 시성한 바 있다.

한국 천주교의 주요 성지로 천진암과 배론 성지를 많이 찾는다. 필자도 어느날 우연히 배론 성지를 방문하게 되어 그곳에 얽힌 많은 성인들의 행적과 사연들을 듣고 충격과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배론성지는 충북 제천에 위치하며, 백운산과 구학산 줄기에 둘러싸인 이 지역 골짜기의 지형이 배(舟) 바닥처럼 깊고 넓다는 데서 유래했다. 조선 시대 때는 한양에서 배론까지 걸어가려면 꼬박 15일이 걸렸다. 당시 천주교인들은 ‘사교(邪敎)’를 믿는 자를 체포해 능지처참하던 박해의 광풍을 피하기 위해 이곳에 몸을 숨겼다. 배 모양을 닮아 배론이란 이름이 붙은 지형을 반영해 성당도 방주를 형상화했다.

여기에는 1801년 8월 황사영(黃嗣永,1775~1801)이 숨어서 ‘백서(帛書)’를 썼던 토굴이 있다. 1988년 복원된 토굴의 입구는 세로 1m50㎝ 정도이기 때문에 허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었다. 백서 사본이 전시된 내부는 두 사람이 누워 잘 수 있는 정도의 넓이였다.

황사영 백서는 한국 천주교회 박해사를 정리한 최초의 문서로서 흰 명주천 위에 깨알 같은 글씨로 적어 누가 어떻게 박해를 당하고 처형됐는지를 122행, 1만3384자의 서한 형식으로 깔끔하게 기록한 문서다. 이 백서는 중국 베이징에 있던 프랑스인 주교 구베아에게 보내기 위해 작성된 것으로 황사영은 백서에 1801년 1월 시작된 신유박해의 전말을 적은 뒤 프랑스의 “병선에 병기를 많이 싣고” 조선 해안에서 무력시위를 벌여 “왕에게 선교를 용인하고 우호 조약을 체결하도록 요구하라”고 간청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그러나 백서는 전달되지 못했다. 전달 임무를 맡은 밀사가 체포되고 곧이어 황사영도 체포되어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되어 순교하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치적 이유가 더 컸던 신해박해(1791년)에서 병인박해(1866년)까지 1만5000명의 신도가 참수되었다. 교회사학자 로빈슨의 지적처럼 조선 천주교도들이 겪었던 고초는 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당했던 고초보다 더 극심했다. 질병과 기근에 시달렸던 평민들에게 서학인 천주교가 새로운 꿈을 심어주던 때였다. 한국 최초의 천주교도인 이벽이 ‘천주공경가’를 지어 불렀고, 조선 최고의 학자 정약용이 천진암 주어사에서 서교(西敎) 강학회를 개최했다. 1780년대 조선인들 사이에는 ‘큰 배가 조선에 올 것이다’(大舶來鮮)란 기대와 희망이 소문으로 널리 퍼졌다. 황사영의 백서는 다양한 시대와 핍박의 현장에서 신앙심과 절벽의 상황을 뛰쳐나오려는 마지막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의 신실한 신앙과 참담한 사회여건에 저항하는 의견표현인 백서(帛書)를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연계하여 반대파의 척결과 탄압의 기제로도 사용하여 많은 사람을 순교의 현장으로 몰아갔을 것이다.

2014년 성인 시복에서 정치적 상황 등을 이유로 황사영의 시복을 제외했다는 사실에 개인적으로 안타깝게 생각해본다. 물론 전문가들의 깊은 논의가 있었겠지만, 그의 깊은 신앙심과 고난에 처한 성도와 민족구원을 위한 의견표현과 행동은 재평가 될 필요가 있다. 그의 삶은 어쩌면 삶과 생존이 위협 받고 있는 민족의 정의와 동양평화를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한 안중근 의사의 고뇌와 깊은 신앙심에 의한 행동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을 저격한 안중근 의사를 살인자로 인정하고 권력을 갖은 일본의 입장만을 고려하여 핍박받고 생명의 기반이 위협당하는 우리민족을 간과한 뮈텔(Gustave C. M. Mutel, 1854-1933)주교의 처사를 생각하게 된다. 뮈텔은 안중근의 최후의 미사에 신부를 파견하지도 않았고, 스스로 미사를 담당한 빌렘신부를 오히려 2개월 동안 미사를 금지시킨 것이다. 물론 후대에 김수환 추기경 등 한국천주교는 안의사를 신도로 인정하고 재평가한 바 있다.

성염 전 교황청 대사가 황사영 순교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정치적 죽음이 순교가 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사실 예수의 죽음만큼 정치적인 게 없다”고 말하면서 “당시 권력자들은 황사영을 비롯한 천주교 순교자들을 구질서를 뒤엎고 새 세상을 만들려고 했던 혁명세력으로 봤던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의 사회적 소수자였던 황사영의 순교는 우리 시대 종교와 신앙인들에게도 뜻하는 바가 크다. 성 전 대사는 “모든 박해는 정치적 박해”라고 단언하며 종교를 가진 신앙인들이 소수자를 외면하고 정치와 무관하기란 조선 시대에도 현시대에도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시대를 앞서 깊은 신앙의 길을 행동으로 보인 황사영은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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