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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와 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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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와 무사

우리민족을 나타내는 다양한 말 중에 선비와 선비정신을 드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선비는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을 이르는 말로, 신분의 차이와 상관 없이 도덕적이고 학식이 있는 사람을 선비라고 하였다. 불교 중심의 고려를 뛰어 넘어 새로운 조선을 세우기 위해 새 사상으로 유학을 채택하던 시대에 유학(儒學)을 공부하는 유생들 그리고 그 시대 대부분의 양반들을 지칭하는 의미로도 사용하게 되었다. 선비는 넓은 의미에서 조선시대 사회지도층을 포괄하는 표현이며, 공부 안하고 놀고 먹거나 양식 없는 자들은 당시에도 선비라고 불러주지도 않았다.

선비 정신으로는 예(禮)를 존중하며, 학문을 배우고 연마하며, 절개와 충절을 갖고 시서화(詩書畵)에도 능하는 등 당대 지식인의 전범(典範)으로 이해되었다. 또 선비들의 정신으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강조했다.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넓고 큰 원기나 거침없이 넓고 큰 기개를 의미하며 누구를 만나도 거리낌이 없다는 도덕적 용기와 자연을 이해하는 웅혼한 기상을 지향하는 온전한 상태를 의미하기도 했다.

우리 역사에 많은 선비들이 등장한다. 조선 초기의 황희(黃喜) 정승과 맹사성(孟思誠) 등 유명 관료와 선비, 절재 김종서(金宗瑞), 사육신 등을 들 수 있다. 퇴계 이황은 선비의 전형으로 높은 벼슬을 탐하기보다 학문과 실행에 전념하고 후학을 지도하여 당대 조선의 사상체계를 구축하였다. 율곡 이이도 선비의 전형으로 학문은 물론 현실 정치에도 높은 성취와 대안을 제시하였다. 관동별곡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송강 정철(鄭徹)이 사헌부지평으로 있을 당시, 처가의 재산을 탐내 처남을 살해한 명종의 육촌 경양군(景陽君)의 처벌문제와 관련하여, 명종의 선처를 당부하는 요청에도 불구하고 강직하고 청렴한 자세를 고집하여 그에게 사형을 집행하였고 명종의 미움을 사 말직에 머무르기도 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인목대비를 폐위한 광해군의 행위를 비난하는 상소를 올려 광해군은 그를 귀양보냈다. 선비는 옳을 일에는 죽음을 두려워 않았다. 성품이 강직하고 시비를 가림에 타협이 없어 자주 유배를 당했 고산 윤선도는 당시 권력의 중심이던 송시열을 탄핵하여 귀양을 가게 되는데, 귀양을 가면서 '내 나이 73세인데 얼마나 춥겠느냐'며 초연히 삼수갑산(三水甲山)으로 갔다.

임진왜란 때도 왕은 도망가고 국가가 전란을 방어 못할 때 많은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켰다. 조선 후기 선비로 면암 최익현과 매천 황현을 들 수 있다. 면암은 구한말 한일합방이 되자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왜군과 싸웠다. 전쟁터에서 왜군에 포위되어 대치 중에 왜군들이 쳐들어왔다. 그 때 왜군들의 앞에 선 조선군을 보자 모두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같은 동포를 죽일수는 없다고 포박을 당해 결국 대마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매천 황현은 한일합방의 역사적 비운을 당하게 되자 쓰던 <매천야록>을 절필하고 자결을 한다. 유서에서 그는 '나는 죽어야 할 이유가 없지만, 이 땅에 선비가 있어온 지가 400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데 한명쯤 죽지 않으면 얼마나 원통하랴.'던 그의 절명시(絶命詩)는 유명하다.

이에 비해 일본을 대표하는 말로 무사(武士, 侍, 사무라이)는 봉건 시대의 주군을 가까이에서 모신다는 뜻의 단어, 시(侍)에서 나온 말로써 귀인을 경호하는 사람을 가리켰으나, 헤이안 시대 이후 일반적인 무사를 가리키게 되었다. 주군을 잃은 사무라이는 로닌이라 불리며, 칼솜씨를 제외한 기술이 없어 특별한 직업 없이 유랑하거나 걸식하며 살인청부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도했다. 사무라이 정신의 요체는 명예(名譽)와 충성(忠誠)을 들 수 있다.

선비와 사무라이의 행동을 비교한 유명한 사례가 자주 인용된다. 먼저, 떡집 주인이 사무라이를 찾아왔다. 사무라이 아들이 떡을 훔쳐 먹었다는 것이다. 어린 아들은 먹지 않았다고 했다. 사무라이는 칼을 들어 아들 배를 갈랐다. 떡이 나오지 않자 사무라이는 떡집 주인 목을 치고 자기 배를 그어 자결했다. (김소운 '목근통신')

그리고, 세종이 아꼈다는 조선시대 문인 재상 윤회(尹淮)가 젊어 여행길에 올랐을 때 일이다. 여관 주인이 방이 여의치 않다 하여 뜰에 앉아 있었다. 주인의 아이가 진주(眞珠)를 갖고 놀다가 떨어뜨리자 곁에 있던 거위가 진주를 삼켜 버렸다. 주인은 윤회를 의심하여 묶어두고, 날이 밝으면 관아에 고발하기로 했다. 윤회는 "저 거위도 내 곁에 매어 두라"고 했다. 이튿날 아침, 거위 뒷구멍에서 진주가 나왔다. 주인이 "어제는 왜 말하지 않았소?" 묻자 윤회가 말했다. "어제 말했다면, 주인장은 필시 거위 배를 갈라 구슬을 찾았을 것 아니오." (이긍익 '연려실기술')

위의 두 사례에서 처럼 어려움에 처한 우리사회에 현명한 선비의 행동과 하나의 가치만 집착하는 사무라이 행동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문(文)과 무(武)를 겸비하고 원리에 충실하되 상황을 바로 보는 지혜와 바른 행동은 늘 우리를 안전과 발전 그리고 행복으로 인도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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