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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와 카스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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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와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피델 카스트로(1926-2016)가 지난 2016.11.25일 9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를 기리는 대규모 추모식이 29일(현지시간) 아바나 혁명광장의 호세 마르티 기념관에서 열렸다. 피델과 혁명동지였던 체 게바라의 얼굴을 형상화한 조명구조물이 보이는 광장에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의 시신은 한 줌의 재가 되어 다시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악지대로 돌아간다. 그는 살아 생전 혁명가와 독재자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았으며, 637회의 암살 공모와 164회의 실제 암살 시도를 딛고 살아남았다. 그는 쿠바의 인권 변호사, 노동운동가, 군인이자 정치가, 공산주의 혁명가로 알려져 있다. 1959년부터 1976년까지 쿠바의 총리를 지내고, 1976년부터는 국가평의회 의장을 지내다가 2008년 2월에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에게 의장직을 승계하며 2선으로 물러났다. 카스트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집권한 지도자(52년 2개월 혹은 49년 5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그는 "내 생애 최고의 업적은 수많은 암살 시도에도 살아남은 것"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카스트로와 혁명동지였던 체 게바라(Che Guevara,1927~1967)도 쿠바 혁명의 핵심이다. 그는 쿠바혁명 승리 후 쿠바 공산당과 쿠바 혁명정부의 중요 직책에 있으면서 혁명을 더욱 전진시키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산업성장을 조종하는 책임자였고, 토지개혁을 준비하고 1959년 11월∼1961년 2월에 쿠바국립은행총재, 1961년 2월부터 쿠바산업부장관도 함께하였으며 1962년에 쿠바통일혁명조직 전국지도부 및 비서국에서 일하여 '쿠바의 두뇌'라 일컬어졌다.

1965년 4월, "쿠바에서는 모든 일이 끝났다"라는 편지를 남기고 떠나, 볼리비아로 투쟁무대를 옮겨 바리엔토스 정권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으나, 1967년 10월 9일 미국이 가세한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잡혀 총살당했다. 총살 후 그의 시체는 정부에 의해 언론에 공개되었으나, 체 게바라를 하찮은 인간으로 보이게 하려는 의도와 달리, 그의 모습이 예수와 비교되면서 다시 많은 이들의 추앙을 받게 되고, 30년후 그의 시체는 볼리비아에서 발굴되어 혁명가로 활동했던 쿠바에 안장되었다.

체 게바라는 사후에 전 세계적으로 '체 게바라 열풍'을 일으켜 킬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쉼없이 혁명을 추구했고, 새로운 도전을 이어 갔다. 젊은 시절 아르헨티나 의사의 자리를 버리고 전 아메리카의 쿠데타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혁명에 뛰어들었으며, 쿠바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도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또 다른 혁명을 위해 헌신하는 숭고한 모습은 세계의 변화와 혁명을 꿈꾸는 많은 젊은이들을 감동시켰다. 그는 어쩌면 권좌에 장기간 머문 카스트로보다 길지 않는 삶으로도 그의 정신과 꿈으로 후대에 더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쿠바에서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의 경우는 러시아 혁명의 스탈린(Iosif V. Stalin,1879~1953)과 트로츠키(Leon Trotskij,1879~1940)의 경우를 연상하게 한다. 트로츠키는 레닌의 사후 이오시프 스탈린과 이론적인 차이가 생겨 권력투쟁을 하게 되었다. 트로츠키는 "영구혁명론"으로 세계 공산주의 혁명을 계속 진전시킬 것을 주장했지만, 스탈린은 소비에트 연방을 튼튼한 공산주의 국가로 만든 후, 공산혁명을 확산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트로츠키의 세계혁명이론은 서유럽의 공산주의 지식인들과 혁명가들에게 혁명이론으로 지지를 받았으나, 결국 그는 스탈린과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인민의 적'으로 몰려 소비에트 연방에서 쫓겨나게 되어 멕시코로 망명하였다. 말년에 멕시코에서 거주했으나, 스탈린이 사주했다고 여겨지는 암살자에 의해 등산용 피켈로 살해당했다

체 게바라도 혁명의식에 충실하였으며, 트로츠키식 영구혁명론에 동조하여 남미와 전 세계를 혁명으로 변화하기를 바랬다고 볼 수 있다. 아르헨티나 사람인 게바라가 쿠바의 혁명에 참여한 것은 트로츠키식 사상에 동조했기 때문이며, 쿠바 혁명이 끝난 후에도 모든 특권과 기득권을 버리고 볼리비아로 가서 새로운 혁명을 준비한 것은 그의 지칠줄 모르는 혁명정신이라 할 수 있다. 볼리비아에서 그는 게릴라들과 동고동락하며 또 다른 혁명을 기획하고 실행한 것 역시 자신이 신봉한 이론을 실천하겠다는 의지였다.

트로츠키와 체 게바라는 비슷한 점이 많다. 쿠바의 혁명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새 혁명을 추구한 체 게바라는 트로츠키의 노선을 따라간 셈이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 이후에도 ‘영구혁명론’을 주장해, 볼셰비키 혁명의 완수를 우선시한 레닌과 결별했다. 트로츠키는 사회주의 혁명이 영속해서, 무엇보다 국제적인 규모로 계속해서 진행돼야 한다고 믿었다.

우리는 역사에서 한 때 크게 성공한듯하나 별로였고, 한 때 실패한 듯하나 실은 나중에 크게 성공했던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아문센과 남극탐험을 다투던 스콧(Robert Falcon Scott, 1868~1912)은 남극 탐험에서 비록 아문센에 뒤졌으나 그의 일기와 기록 등으로 사후에 더 큰 평가를 받았던 것처럼 개척자는 그의 성취도 중요하나 실은 그의 정신과 그 삶의 진정성과 치열함에 더 큰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섀클턴(Ernest Henry Shackleton 1874~1922)의 탐험과 그의 삶도 비슷하다. 우리 역사의 성삼문과 신숙주의 그것을 비교해 보게도 된다.

 

김홍섭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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