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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사랑신비주의 영성신학자 끌레르보의 베르나르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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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수천교수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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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사랑신비주의 영성신학자 끌레르보의 베르나르의 교훈

(김수천-영성신학교수)

영성신학은 사랑학(science of love)과 깊은 관련이 있다. 영성신학적 의미의 사랑이란 피조된 인간이 피조되지 않은 신적 사랑 가운데 머무는 것을 의미한다. 신적 사랑을 경험하면 인간 존재 안에 변화가 일어나는데 신의 본성에 참여하게 된다. 신의 본성이란 전적으로 자신을 나누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랑학에 관한 스승으로 12세기에 시토 수도회를 이끌었던 끌레르보의 베르나르(Bernard of Clairvaux)가 있는데 그의 교훈은 사랑의 삶에 대한 좋은 통찰을 제공한다. 베르나르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하여(On the Love of God)라는 글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자가 추구하는 사랑을 네 단계로 설명하였다. 첫째 단계는 본성적 자기 사랑이다. 인간은 누구나 본성적으로 자신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다. 둘째 단계는 하나님의 은혜 또는 축복을 위한 하나님 사랑이다. 본성적으로 자신을 사랑하다보면 결국 이기적인 사랑에 머물게 되고 그것은 욕심을 따르는 삶을 살게 된다. 그래서 진지하게 삶의 의미를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초신자가 경험하는 사랑은 대부분 하나님의 은혜를 위한 하나님 사랑이 된다. 셋째 단계는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 사랑이다. 신앙생활이 성숙해 지면 우리는 하나님 되심에 대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은 위대하시며 그 자체로 피조물인 우리의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인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넷째 단계는 자신을 위한 하나님 사랑이다. 이것은 둘째 단계와 유사한 것처럼 보이나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랑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신이란 창조주의 사랑에 의해 압도된 자신을 의미한다. 성령을 통해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언제나 계시며, 그래서 자신보다 자신을 더 잘 알고 자신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둘러싸인 자신을 의미한다. 그것을 영성가들은 지복(至福)의 상태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바로 그러한 상태를 위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상태에 머물 때 우리 안에 무엇이 일어날까? 첫째, 성화의 삶이다. 성화는 성령의 열매이다. 우리는 종종 성령의 능력을 행하는 목회자들 가운데에도 성화의 열매가 부족한 것을 목격한다. 왜 그럴까?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충분히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성화는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만 가능하다. 예를 들어, 성령의 능력을 구해 능력 있는 목회를 하는 목회자에게 좀 더 자신을 부정하는 목회자가 되라는 성령의 음성이 들을 수도 있다. 그 순간 우리 의지 가운데에는 저항도 일어날 수 있다. 그런데 그 저항이 모두 극복되려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충분히 오래 머물러야 한다. 그래서 베르나르가 주도한 시토수도회의 개혁 수도회인 트라피스트 수도사였던 20세기의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머무는 침묵기도(관상기도)는 성화를 위한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라고 말하였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머물때 산상수훈의 진리가 실현된다. 예수님은 일상의 필요에 신경 쓰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셨다. 주지하듯이 그의 나라는 헬라어로 하나님의 지배를 의미한다. 하나님이 내 마음을 지배할 때 우리는 내 문제가 아닌 이웃과 사회의 문제를 위해 헌신하게 된다. 사실 나의 일상의 필요는 공급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 삶의 결핍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재정적 결핍에도 불구하고 이웃과 세계의 고통에 관심을 갖을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다. 우리의 한계는 자기중심성이고 그것이 타락의 원인이 되었다. 그 타락의 결과 인간은 죽음에 처해지게 되었다. 죽음이란 영원한 허무인 이기적인 사랑을 추구하다 끝내 무의미성으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신적 사랑에 머물 때 우리는 그러한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선포할 것이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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