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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경영 | 시대를 앞선 여성 기업가 백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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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홍섭 교수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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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우리 사회에서는 “부자 되세요”나 “10억 모의기” 등 부자되기 위한 노력과 광고가 한 때 유행하였다. 동시에 부자와 상위계층의 책임에 대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도 제기되고 있으나, 그 영향력과 참여정도는 매우 미약하다고 평가되고 있다. 여기 조선 말기와 일제 시대를 거치며 탁월한 경영과 담대한 행동으로 거부가 되었고, 동시에 그 재산을 사회에 헌신한 드문 여성 기업가가 있다.

 그 주인공 백선행(白善行, 1848년~1933년)은 조선 시대 말기의 여성 사업가로서 자선 사업을 많이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녀의 ‘선행(善行)’이라는 이름은 오래 동안 사회와 주변 사람들에 베푼 그녀의 헌신과 사랑의 활동으로 얻어진 것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에서는 수원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으나, 북한에서는 그녀가 평양 중구역에서 태어났다한다.

백선행은 14세에 안재욱과 결혼했으나 2년 후인 16세(혹은 20세)라는 젊은 나이로 과부가 되었고, 자수성가해 평양을 대표할 만큼 큰 갑부가 된 입지전적인 여인이다. 백선행이 재산을 모은 과정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 단계에서 그녀는 근검절약하는 생활로 ‘작은 부’를 얻을 수 있었다.

먼저 그녀는 자신의 집 앞뒤 마당에 봉선화를 심어 꽃을 따고 씨를 받아 5일마다 장터에 내다 팔았다. 질동이를 머리에 이고 음식점을 돌아다니면서 음식 찌꺼기를 얻어와 돼지도 길렀고, 뽕나무를 가꾸어 누에를 치고, 목화씨를 발라 기름을 짜고, 물레와 베틀을 마련해 밤새도록 무명과 명주를 짜 시장에 내다 팔았다. 이렇게 해서 한 푼 두 푼 번 돈은 절대로 허투루 쓰지 않고 알뜰살뜰 모았다. 그녀는 "먹기 싫은 음식을 먹고, 입기 싫은 옷을 입고, 하기 싫은 일을 한다"는 말을 생활신조로 삼았다고 한다. 백선행은 이렇게 10여 년 동안 모은 돈으로 평양 주변의 땅을 사들였는데, 특히 흉년이 들거나 먼 곳으로 떠나는 사람들의 토지를 싼값에 매입해 재산을 늘렸다.

당시 그녀는 후일에 쓸 목적으로 큰 땅을 사고자 했다. 그 소문이 퍼저 당시 거간꾼들의 소개로 2천평을 샀는 데 후에 알고 보니 이는 황무지와 같은 돌산인 만달산이었다. 이 일로 백과부가 망했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내가 스스로 정한 실수이니 남을 탓하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후에 일본의 시멘트 사업가 오노다(小野田)가 비싼 가격으로 그 땅을 사려해도 팔지 않고 버텼다.

 일본의 사업가가 황무지 돌산을 사려하는 데는 숨은 이유가 있다는 사업가적 판단과 배포로 끝까지 협상하여 당초 구입한 가격 보다 몇 십배 높은 가격으로 일본인에게 되팔아 큰 돈을 모으게 된다. 그녀가 바위산에 불과한 만달산을 사들인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일본인들이 석회석이 많이 나는 땅을 찾아다닌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경성을 돌아보고 온 다음 현대식 건축물이 들어서기 시작하면 시멘트에 필요한 원료인 석회석이 대량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정작 그녀가 다른 사람이 쉽게 이룰 수 없는 큰 부를 거머쥐게 된 이유는 미래를 헤아릴 줄 아는 통찰력으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혜안과 원칙을 지키는 강한 성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후에 당시 평양YMCA회장이던 조만식 장로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전재산을 사회사업에 기부하고, 그 흔한 환갑잔치도 벌이지 않고 여느 때처럼 거칠고 소박한 식사를하고, 일찍 세상을 떠난 남편의 무덤을 찾았다.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마을에 들러, 마을의 돌다리를 놓을 수 있도록 모든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말했다. 백선행은 특히 기독교계 학교에 기부를 많이 하였다. 선교사가 세운 광성보통학교에 전답 1만 4천 평(당시 가격 1만 3천원, 오늘날 화폐가치로 약 13억 원)을 그 학교의 기본금으로 기증했다.

그리고 추가로 13만원(오늘날 화폐가치로 약 130억 원)을 기부하여 광성학교는 그 돈으로 총독부의 조선인의 사립학교 설립 방해를 극복하고 재단법인을 설립할 수 있었다. 또 장로교에서 경영하는 숭현여학교에 전답 2만 6천 평(당시 가격 3만원, 오늘날 화폐가치로 약 30억 원)을 기증하였다. 뿐만 아니라 장로교 계통의 창덕보통학교에 6천원(오늘날 화폐가치로 약 6억 원) 상당의 땅을, 숭인상업학교에도 1만 3천원(오늘날 화폐가치로 약 13억 원) 상당의 땅을 기부하였다. 이 돈으로 이 학교들은 재단법인 설립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

평양에 있는 기독교계 학교들이 거의 모두 백선행의 기부금으로 운영되었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백선행은 학교 경영권에 관심이 없었다. 당시 18만원(오늘날 화폐가치로 약 180억 원)이라는 거액을 아무 조건 없이 학교에 기부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 조선 총독부에서 상을 주려고 했으나 그녀는 거절했다.

부자는 많다. 가난한 사람은 더 많다. 국제 금융위기의 때에 맞는 연말연시에 사회단체나 고아원, 장애시설 등이 더 어렵다고 한다. 백선행과 같이 바르게 벌어 바르게 나눌 수 있는 참 부자가 더욱 그리운 것은 불황의 경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부자가 아닌 평범한 우리들도 나눌 수 있을 때 우리 사회는 더 부요해지고 더 살만한 미담이 넘칠 것이 아닌가? “나눔이 기적이다”란 말이 자꾸 생각나는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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