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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회는 정교분리(政敎分離)를 해야 한다?, 그 역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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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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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구 박사

 

한국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전광훈 목사)의 이른바 '시국선언문'과 문재인 정권의 하야 투쟁 궐기대회는 교계 안팎에서 적지 않은 파장을 낳았다. 고신대학 석좌교수인 손봉호 박사는 “기독교회 이름으로는 절대로 정치를 할 수 없다”고 크게 반발했다.

김명혁(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명예회장) 목사를 비롯해 안재웅(아시아기독교협의회 전 총무) 목사, 백도웅(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전 총무) 목사, 유경재(대한예수교장로회 원로) 목사, 이동춘(기독교대한복음교회 전 총회장) 목사, 전병금(한국기독교장로회 전 총회장) 목사 등 기독교계 원로 25명은 “한기총 대표회장의 정치 야욕적 망발은 한국 기독교회를 수치의 대상으로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낡은 극단적 적대 이데올로기를 내세우고, 기독교회와 교회연합기구를 구태의연한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추락시키고 있다”며 비난의 소리를 높였다.

이들 원로 기독교인들은 “성직자는 모두를 위한 교회 공동체의 목회자로서 정파 소속이나 당파 소속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소속으로 성직의 공공성을 지켜가야 한다”며 “교회와 기독교 연합체의 정치화는 교회의 신앙적 공공성을 왜곡하는 일이며 당연히 우리 사회 전체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특히 손봉호 교수는 “목사가 교회의 성직자 자격으로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기에 금지하는 것”이라며 “적어도 교회와 교회 대표의 이름으로는 정치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 역사를 놓고 봤을 때 '정교는 분리해야 한다'거나 '교회나 목사는 정치에 참여하면 안 된다'는 주장은 일방적인 것이다. '비정치가 한국교회의 전통이었다'는 것도 맞지 않다. 어느 한 쪽의 입장이었을 뿐이다.

기독교와 교회가 정치 문제에 참여한 가장 큰 사건은 3·1 운동이었다. 그때 선교사들은 교회가 독립운동에 나서는 것으로 교회 활동이 탄압을 받을까 우려해서 이를 금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적극적으로 이를 주도했다. 독립운동에 나선 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 '구령'과 '구국'은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 교회의 사명은 개인 구원에서만 그치지 않아야 하고 나라를 구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게 그들의 신앙이었다. 그런 저항의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의 입장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해방 직후에도 많은 목사와 기독교인들이 정치에 참여했다. 기독교회가 새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데에 남북이 예외가 없었다. 1945년 9월초에 신의주의 장로교 목사 윤하영과 한경직이 주도한 ‘기독교사회민주당’이 창당되어 민주주의 정부의 수립과 기독교 정신에 의한 사회개량을 내걸었고, 1945년 11월초부터 평양, 장로교의 김화식, 김관주 목사, 감리교의 신석구, 송정극, 이피득 목사 등이 ‘기독교자유당’ 창당을 계획했다. 조만식 장로가 주도하였던 ‘조선민주당’이 있었고, 하다못해 김일성을 지지하던 목사 강양옥도 ‘기독교연맹’을 설립했다.

남한에서는 박용희, 강준표, 박용래 등 개신교 지도자들이 주축이 되었던 ‘사회민주당’, 김관식, 양삼, 백영엽, 백낙준, 윤하영, 최홍종, 구자옥, 김동원, 조만식, 이용설 등이 주도했던 ‘고려청년당’, 오윤선, 정인과, 오화영, 계병호, 백남훈 등 목사와 평신도 지도자들의 주도로 창당된 ‘신한민족당’ 등 기독교인들로 주축이 된 정당들이 창당되었다.

또한 김규식의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하며 엄요섭, 이강훈, 강원용, 김영주 등의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가 창설되었고 좌익계 기독교 조직이었던 김창준의 ‘기독교민주동맹’도 있었다. 이들 정당들은 모두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민주정부의 수립을 표방한다고 주장했다.

 

김명구 박사(연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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