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칼럼 분류

밥 피어스 –불길 같은 사역자Ⅰ

작성자 정보

  • 연합기독뉴스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장자옥 목사

 

최소한 6.25 전란의 포화 속에서 헐벗고 굶주리다 죽어가는 어린이들에게 밥이라도 먹여 살려야 할 것 아니냐고 자신의 일생을 미련 없이 불태우다 간 밥 피어스(Bob Pierce 1914-1979)목사. 그의 활화산같이 타오르는 사명과 헌신 뒤에는 오로지 그만이 홀로 감내해야 했던 자기희생과 인간이기에 끝내 겪어야했던 좌절의 흔적이 너무나 절절했음을 새삼 깨닫고, 한동안 혼란한 내 생각을 정리하며 묵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실 그는 교단이나 기관으로부터 독립선교사로서 월드비전을 세우고 복음을 전한 전도사였다. 그리고 그의 사역은 한국에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세계의 고통 받는 모든 인류를 향한 구령과 구호사역이었다. 그러나 해방 후 우리나라에서 그보다 더 큰 영향력을 끼친 선교사는 찾지 쉽지 않다.

밥 피어스는 1914년 10월 8일 미국 아이오와 주 포트다지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감리교 평신도였으나 후에 나사렛교회에서 봉사했다. 피어스는 자연히 신앙적 분위기에서 자랐는데 그는 벌써 12세 때 소명을 받았다. 그는 패서디나 대학을 다니던 중 목사의 딸과 결혼하였고 복음전도자의 소명을 크게 느껴 학업을 그만두고 순회설교가가 되었다. 1940년 26세에 침례교 목사안수를 받고 캘리포니아 웰링턴침례교회에서 잠시 목회하였고 1944년 십대선교회 창설에 참여하여 1945~49에 부총재로 지냈다. 그는 한국에 오기 전 빈손으로 전도와 선교를 결심했다. 그는 “인간의 최선을 다한대서 그치는 것으로는 안 되고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 하셔서 인간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영역 밖의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일. 그것이 하나님의 방이다. 당신이 줄 수 있다고 생각되는 가능한 자리에 나아가지 않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그는 짧은 중국선교를 통하여 선교현장과 후원자 연결모금이라는 그만의 독특한 선교방법을 착상하고 한국을 중심으로 선교와 구제 사업을 본격적으로 펼쳤다. 그의 한국 사역은 1949년 9월 남대문교회 부흥회를 시작으로 1955년 2만 5천 달러를 가지고와 대대적인 부흥회를 인도했다. 56년 동대문운동장 전도 집회에는 이승만 대통령 각부 장관, 육군참모총장 등 8만 명이 모였고 10,083명의 결신자를 얻었다. 이 때 통역은 한경직 목사였다. 사실 1973년 백만 집회를 했던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6.25후 서울집회에서 밥 피어스 목사와 함께 참여하여 생생한 부흥의 현장을 이미 목도했었다. 피어스 목사는 전란 후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목회자 수양회를 인도하였다. 이 집회는 전후 영 육간에 상심이 컸던 한국 목회자에게 커다란 은혜와 도전을 주었다. 수천 명씩 모이는 집회였다. 그가 반공포로가 16만 4천명이 수용된 거제도에서 전도할 때 인민군 10만 명이 교적부에 등록하였고 6천 명이 영접하였다. 그리고 130명의 반공포로들을 신학교에 보내주었다. 당시 한국전란으로 전국에서 목사, 전도사 등 교직자만 439명이 순교했다. 이런 상황에서 신학생을 길러내고 교역자 수양회를 통하여 영력을 충전시킨 것은 탁월한 착상이었다고 본다. 그는 고아구호사역과 전쟁미망인 구호사역에 전력했다. 그는 한국고아들을 구하려고 1950년 종군기자 신분으로 한국에 입국한다. 당시 전쟁고아가 20만 명인데 5만 명만 고아원에 수용한 상태였다. 나머지 아이들은 벌판에 버려진 짐승처럼 살았다. 그는 그 참상을 목도하면서 사진을 찍어 미국 그리스도인과 결연을 통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모자원인 ‘다비다모자원’을 세워 성공을 거두었다. 1958년 11월 3일 당시 보건사회부 장관 손창환씨는 밥 피어스를 향하여 “박사님의 끝없는 노력은 한국고아의 아버지로 불리는데 조금도 손색이 없는 분”이라고 증언했다.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목록

최근글


인기글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