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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로와 저어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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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기독뉴스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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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전 교수

 

며칠 전 쓰던 글을 완성하고 저녁나절 잠시 가까운 곳에 있는 호조벌을 걸었다. 얼마 만에 걷는 것인지 다리가 놀란 듯 했다. 요즘은 통 걷지 않고 책상에만 앉아있어서인지 걷는 것이 불편할 만큼 허둥거렸다. 조금 걸으니 나름 컨디션이 회복이 되면서 천천히 걸을 수 있었다. 이미 해가 질 녘이라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한 상태였다. 농수로를 따라 내리는 어스름한 분위와 늦가을의 정취는 잠시 취할 수 있었다.

수로를 따라서 걷노라니 유유자적하는 생명들이 매인 채 허둥거리는 나의 마음을 쉽게 빼앗았다. 조용한 들녘의 농수로, 그곳에서 만찬을 즐기고 있는 생명들을 만났다. 그곳에는 백로들이 피딩 타임(feeding time)을 즐기고 있었다. 고고한 자태로 수로를 거닐면서 먹이사냥을 하고 있는 것이 정겨웠다. 저녁나절 하루를 마무리 하면서 쉼을 얻으려는 때, 백로들은 만찬을 위해 수로에 모여 있었다. 녀석들의 만찬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숨소리도 죽인 채 천천히 걸었다. 고개를 길게 빼고 지나는 물고기를 기다리고 있는 조심성, 그렇지만 그 자태는 흐트러짐이 없다. 비록 수로에서 먹이를 얻는 입장이지만 백로로서의 고고함을 잃지 않으려는 듯 바쁘지 않다.

쇠백로와 중대백로가 뒤섞여서 조용히 만찬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정경은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로움이었다. 멀리 서녘으로 넘어가는 태양은 끝자락을 구름에 조금 남긴 채 이미 얼굴을 숨겼다. 수로를 따라 멀리 보이는 지평선은 들녘에 담긴 가을풍경을 대지의 캔버스에 담아놓았다. 유유자적한 모습이지만 결코 요란스럽지 않게 만찬을 즐기는 백로들과 함께 걸을 수 있음이 행복이었다. 가을이 가득 담긴 풍경화의 일부가 되어 수로를 따라 걷고 있는 나는 깊은 가을날의 주인공이었다.

그런데 내 눈에 다른 또 하나의 생명체가 보였다. 저어새였다. 백로들 무리에 섞여서 먹이를 찾고 있는 저어새는 두 마리. 부리를 보아 금년에 태어난, 아직 완전한 성체가 되지 못한 것 녀석들이다. 그래서인지 몸집도 작은 듯했다. 백로들과 섞여있으면서도 구별이 되지 않을 만큼 몸집이 비슷했다. 쇠백로와 중대백로, 백로들 중에서 작은 편이다. 대백로나 왜가리는 큰 새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적다는 의미로 분류하는 녀석들이다.

그런데 녀석들과 함께 저어새 두 마리가 만찬을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백로들이거니 하고 보아서인지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녀석들의 먹이를 사냥하는 방법이 유별나기 때문에 쉽게 구별될 수밖에 없었다. 저어새는 백로와 달리 부리를 물과 펄 속 깊이 박고 좌우로 저으면서 부리에 닿는 촉감으로 먹이사냥을 하기 때문에 일단 먹이를 찾기 시작하면 내내 머리를 좌우로 저어댄다. 저어새는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머리를 좌우로 젖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그것도 제자리에서 젖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진행하면서 저어야 하기 때문에 함께 있는 백로와는 확연히 비교가 된다.

백로는 차려진 상에서 만찬을 즐기려는 모습이라면 저어새는 상을 받지 못한 채 허겁지겁 먹이를 찾으면서 즉석에서 먹어야 하니 차원이 다른 만찬인 셈이다. 그나마 부리에 걸리는 것이 많으면 힘이라도 덜 들 텐데 먹이가 잡히지 않으면 머리만 열심히 좌우로 저어야 하는 고된 노동을 동반하게 된다.

야생에서 먹이를 얻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백로도 고고한 자태로 먹이를 기다리지만 많은 시간 기다림의 인내가 필요하다. 하지만 백로와 저어새들이 만찬을 즐기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허락받은 쉼을 누릴 수 있는 것은 행복이었다. 멀리 들녘 끝자락 너머로 저무는 태양이 남긴 붉은 꼬리만큼이나 아름다운 순간을 허락받았다. 백로와 저어새의 전혀 다른 모습도 각각 허락받은 생존을 위한 방식이니 그것을 잘잘못으로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녀석들은 유유자적하면서 수로에서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완전히 지평선 너머로 감춘 태양이 남긴 어둠이 대지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잠시의 시간만으로도 대지의 생명들과 함께할 수 있는 여유를 누릴 수 있고, 그곳의 생명체들과 동행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으련만 여전히 무엇엔가 매인 인생을 살면서 허우적거리는 것이 아닌지...? 어차피 시간을 흐르는 것인데, 같은 시간을 사는 것인데, 무엇을 위해서 그 시간을 할애할 것인지는 자신의 몫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을 탓하지 않고 타자만을 탓하면서 스스로의 책임만 면하려고 하고 있는 인생이야말로 어리석은 것 아니겠는가.

오랜만에 걸은 호조벌에서 만난 백로와 저어새가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주었다.

 

<대신총회신학연구원 원장/ 어진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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