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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 신사참배 거부하고 감옥서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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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경진 장로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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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곡감리교회

 

1881년 삼척군 송정리(현 동해시 송정동)에서 출생한 최인규 권사는 평범한 농부였다. 1919년 동해지역에서 3·1운동을 주도한 같은 마을 출신 김원대 성도 등에게 민족주의 정신을 이어받고 1921년에는 40세에 북평감리교회(현 북평제일교회) 김기정 목사를 통해 예수를 영접하면서 불같은 신앙으로 거듭나 금주, 금연은 물론 섬기던 우상과 각종 제기들을 불살라 버렸다.

1932년에는 권사직첩을 받았으며 성령체험과 치유은사를 경험하면서 전도와 봉사에 더욱 힘썼다. 그는 독립운동가 이수정 선생(1887∼1977·동해교회 원로장로)을 통해 구약성서의 이스라엘 민족사와 같은 조선의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천곡교회 인도자로, 주일학교 교장으로 봉사하며 열정적인 기도 끝에 1935년에는 자신의 소유한 논밭 전부(논 600여 평, 밭 1400여 평)를 천곡교회에 헌납 하였다. 또한 강대상 3개를 만들어 옥계, 천곡, 북평교회에 각각 나누어 주었는데 그 중 1개만 유품으로 천곡교회에 남아있다.

그는 1940년 5월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수감된 후 가혹한 고문 속에서도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만이 경배의 대상이지 다른 신은 경배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십계명에는 하나님 외에 네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말씀이 뚜렷이 기록되어 있다”고 하면서 감옥에서도 예수를 증거 했다.

한번은 일제 경찰이 최인규 권사에게 망신을 주려고 인분 통을 등에 짊어지고 온 동네를 돌며 “내가 신사참배 거역한 최인규요”라고 외치며 다니게 했는데 오히려 그는 주님의 이름으로 박해받음에 감격하였고 마을 주민들로부터 신념이 강한 신도로 추앙 받았다고 한다. 또 한번은 친구 차국성이 고문을 당해 만신창이가 된 최인규를 면회하면서 경찰서장에게 “최인규는 원래 정신병자로 예수 믿고 나은 사람인데 아마도 그 정신병이 재발한 것 같습니다. 석방해주시지요” 라고 했더니 경찰서장이, “당신이 정신병자요, 예수를 믿으려거든 최인규처럼 믿으시오” 했다고 한다. 또한 역시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됐던 이진구 목사(고성교회)가 연로한 그가 안쓰러워 “권사님, 신사참배 하겠다고 말하고 나가세요. 그러다 죽습니다.”라고 말하자 오히려 화를 벌컥 내며 그렇게 살아서 무엇을 하게요? 했다고 한다. 이처럼 최인규 권사는 감옥에서도 늘 찬송을 부르며 전도했고 온갖 회유에도 굴하지 않았다.

 

▲ 최인규 권사 순교기념비


결국 그는 고문 후유증과 옥고를 견디지 못하고 1942년 12월 16일 대전형무소에서 6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며 옥중 순교자의 숭고한 반열에 들었다. 그의 시신은 화장을 하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해방 후에 성내리 삼척읍교회(현 삼척제일교회)에 이장하며 기념비를 세웠다. 당시 천곡교회로 가지 못한 것은 1943년 일제가 교회를 철거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유해는 1986년에야 재건된 천곡교회로 옮겨지고 순교기념비가 다시 세워졌다. 현재 천곡교회는 ‘최인규 권사 기념예배당’이라 명명하였으며 순교기념비는 삼척제일교회와 천곡교회 두 곳에 있고 송정동 741번지에는 그의 생가가 있으며 최인규 권사가 생전에 쓰던 강대상이 유품으로 남아있다.

▲ 박경진 장로 홀리원투어,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 회장 ☎02)2230-5151 최인규 권사는 일제의 우상숭배 강요와 기독교 탄압에 맞서 저항하다 감옥에서 순교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후손이 없고, 평신도여서 세상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빛나는 순교자의 면류관은 오늘을 사는 기독교인들의 가슴에, 그리고 하늘나라 생명책에 각인되어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주소 : 강원도 동해시 천곡동 1081-8 ( 천곡교회 담임 고문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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