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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 수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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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경진 장로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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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촌교회는 1905년, 7명이 집에 모여 예배드림으로 시작되어 1907년에는 초가 3칸을 매입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다.

수촌교회(향토유적 제9호)서 일어난 비극의 역사는 1919년 3·1운동 한 달 뒤인 4월, 수촌리에서 있었던 학살과 방화로, 제암리교회 방화 사건보다 먼저 일어나 화성일대에서 벌어진 참극의 서막이 되었다. 이 사건은 수촌리가 속해있는 장안면과 우정면 지역 주민들이 벌인 독립만세 시위에서 시작되었다.

수촌리와 인근 석포리 사람들은 4월 초, 독립만세를 부르며 주재소와 면사무소로 몰려갔다. 일본경찰이 무자비하게 총을 쏘아대다가 실탄이 떨어진 것을 알고 도망치던 군중이 다시 만세를 부르며 진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가와바다 순사부장과 필사적인 격투를 벌이던 중 흥분한 군중들이 가와바다를 잡아 내동댕이치며 발로 짓눌러 마침내 실신한 것을 버리고 황급히 도망을 쳤다.

 


그 이후 ‘수촌주민일동’이라고 적힌 플랫카드가 발견되므로 경찰은 주동세력이 수촌리 주민들인 것을 확인하고 수촌리에 집중적으로 보복행위를 감행하게 되었다. 일본군은 수촌리를 시위대의 진원지로 지목하고, 계속해서 4차례에 걸쳐 가장 혹독하게 보복을 가하였다.

1차 보복은 4월 5일 새벽 3시 반경 수비대 30여 명을 이끌고 수촌리 큰말을 완전히 포위하고 총격을 가하여 교회당과 가옥 24채에 불을 질러 5명의 주민이 부상을 당했다.

2차 보복은 이날 오후 어은리를 거쳐 발안으로 나오던 수비대가 수촌리에 들러 남은 8채의 가옥을 샅샅이 수색하던 중, 화수리주재소 가와바다 순사를 참살할 때 피가 묻은 옷을 발견하고, 주민들을 발안리주재소로 끌고 가 혹독하게 고문하였다.

4월 7일 일본 수비대는 3차 보복으로 수촌리 가장말을 비롯하여 꽃말, 용담굴을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주민들을 협박하여 발안리주재소로 끌고 가 밧줄에 묶어 몽둥이질하였다. 이날 끌려온 주민들은 130여 명에 달하였다. 4월 8일 전개된 4차 보복에서 수비대는 수촌리로 몰려와 만세시위를 주도한 백낙렬을 찾는데 혈안이 되었으나 주민들의 호응이 없자, 나머지 가옥 4채를 다시 방화함으로, 수촌리는 전체 40여 가옥 중 36채가 불타는 참사를 겪었다.



수촌교회 역시 이때 불에 타버렸는데, 신앙이 깊은 김의태는 자기 집이 불에 타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황급히 교회로 달려가 불속에서 교회의 중요문서인 교적부(생명록)와 당회록 등이 들어있는 50k 이상 되는 궤짝을, 혼자서 밖으로 들어내었다. 이는 수촌교회 유물로 한국기독교 역사에도 기념비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한편, 향토유적 제9호로 지정된 건물은 본래 8칸의 초가 예배당으로 사용해 오다가 1932년 1월 수촌리로 다시 이전하였다가 1987년에 초가형태의 옛 수촌교회로 복원되었다. 한편 그 옆에는 1965년 건립된 현대식 벽돌건물의 수촌교회가 자리 잡고 있다.
 

▲ 박경진 장로 홀리원투어,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 회장 ☎02)2230-5151

이처럼 수촌교회와 제암교회 등이 자리한 경기도 화성 일대는 일제에 맞서던 민족 저항운동의 생생한 현장이다.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라는 제암리 순국기념관의 표어는 관용의 마음과 더불어 생명을 불어넣고 사랑을 전해야 할 교회가 힘을 잃어가는 이 시대에, 교회가 정체성을 잃지 말고 역할과 사명을 다하자는 거룩한 외침으로 다가온다. 
 

 


-주소 :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 수촌리 674 (수촌교회 담임: 한상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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