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분류

공산당과 맞서 신앙을 지키다 희생당한 구림교회 순교자들

작성자 정보

  • 박경진 장로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 영암 구림교회
1922년 구림공립보통학교 교장의 사모였던 김숙자가 김학동, 이신흥 등과 함께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구림리에 예배 처를 마련하면서 구림교회가 시작되었다. 일제강점기에도 복음의 확산과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이들이 계속 더하여 갔으며 해방과 함께 나라의 재건과 자립을 위해 힘을 키우는 한편 이 지역 9개 교회를 중심으로 사랑의 나눔이 아름답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 북한군의 남침으로 인한 6.25전쟁의 발발은 평화롭던 영암 땅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영암지역은 월출산의 험준한 산새로 인해 지방 공산당의 은거지와 빨치산의 중요한 활동거점이었다. 유달리 우익성향이 강하고, 기독교의 영향력이 컸던 이 지역에 인민군들이 남기고 간 상처들은 남도 땅 어느 곳보다도 깊고 컸으며, 교회가 당한 참화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북한군이 밀물처럼 들이닥쳐 휩쓸고 지나간 후 해남군, 강진군, 장흥에서 빨치산들이 월출산으로 이동하면서 영암에 모여들었다. 이들은 구림교회당을 불태우고 교인과 우익인사들을 잡아들였다.
최의순(73·영암신복교회)권사의 어머니인 당시 구림교회 김정님 집사도 공산당에 연행되어 도로변에 위치한 주막에 감금되었다. 이미 그곳에는 구림교회 18명의 집사와 신도, 그리고 면내 우익인사 6명이 끌려와 있었다. 이들은 모두 주막집에 감금된 채 두려움 속에서 하루 밤을 지새웠다. 공산당들은 잡혀온 구림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한 마디만 하면 살려 준다”고 거듭 회유하고 협박했으나, 성도들은 그에 굴복하지 않았다.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신앙을 지켜왔던 그들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불신앙’ 대신 당당히 순교를 택했다.

이튿날인 1950년 10월4일 아침, 어머니에게 아침식사를 갖다 드리기 위해 주막집으로 향하던 최의순 권사는 멀리서부터 주막집에 불길과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공산군이 성도들을 가두고 집을 포위한 채 불을 지른 것이다. 불길에 몸부림치는 비명소리는 1km밖에서도 들릴 정도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찬송가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고 한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감금된 이들 중 교회에 다니지 않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죽음 앞에서는 함께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절규하고 있었다. 이때, 타는 불길 속에서 흘러나오는 찬송소리에 인민군들이 되레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이날의 참화로 영암구림교회에서 18명이 순교했다. (집사- 김정님, 노형식, 장성례/ 성도- 노병철, 노병현, 최경애, 최기우, 이이순, 김덕경, 김창은, 김흥호, 김치빈, 김상락, 김봉규, 천양님/ 성명미상- 3, 4명)

또한 1950년 10월 7일 우리 경찰이 영암읍을 수복하자 궁지에 몰린 공산당은 애국지사에 대한청년단원, 교인 및 양민 등 28인을 군서면 구림리 신근정 민가에 가두고 불을 놓아 집단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처참히 최후를 마친 원통한 넋을 위로하고 그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1950년 10월 10일 바로 그 자리에 합동묘를 만들었으며 후일 잿더미 속에서 뼈들을 모아 합동 묘소로 장례를 치르고 27년 만인 1976년에 다시 넓은 자리로 옮기고 공산당의 잔인한 만행을 규탄하면서 순절비를 세웠다. 합동묘와 순절비는 구림고등학교 앞에 세워져 있다.
순절비가 애국지사를 포함한 일반 순국비라면, 순교비는 신앙을 지키다가 희생당한 순교자비이다. 합동묘소와 순교비는 순교자 학살 현장인 구림면에 지역전체 순교자들을 위하여 2000년에 영암군교회협의회 주도로 세웠다. 순교비에는 영암읍교회 25명, 상월교회 26명, 구림교회 18명, 천해교회 7명, 삼호교회 2명, 서호교회와 매월교회 각 1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이처럼 한국전쟁 기간 중 구림마을에서 좌익에 의해 희생된 28명의 원혼을 위로하는 기념비가 마을 입구에 2개가 세워져 있다. ▲ 순교비와 순절비

한편 전쟁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패잔병들이 북으로 도주하면서 공산당들은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까지 공산당들은 우익인사들과 함께 기독교인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이 때문에 영암군은 6.25를 기하여 13만이었던 인구가 8만으로 줄어들고 이 지역 여섯 교회에서 82명의 순교자가 대거 발생하는 등 전쟁의 상처가 깊게 남아있는 곳이다.
지금도 영암의 신앙의 후손들은 해마다 6·25가 돌아오면 순교자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보면서 당시의 참상을 회고한다. 그리고 순교자의 피로 지킨 교회의 전통과 신앙의 자부심을 가지고 오늘도 복음선교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목록

최근글


인기글


알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