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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광양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관과 신황교회 선교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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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경진 장로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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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황교회 전남 광양시 진상면 황죽리 웅동마을은 광양지역 기독교의 발상지이자, 전남 동부지역 최초로 기독교 복음이 전파된 곳이다. 또한 선교사에 의해서가 아닌, 순수 지역민들이 스스로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전파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1895년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일본으로 도망치려던 일본낭인(야쿠샤)들을 복수하기 위해 한태원은 인천까지 좇아가 살해하였다. 그리고 전남 광양 웅동마을로 그는 피신하여 숨어들었다. 그 정보를 가지고 광주에서 뒤쫓아 온 수사관은 웅동마을에 와서 다 뒤졌으나 검거하지 못하였다. 그는 마을 청년들이 주막에서 술과 노름으로 허송세월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을 정중히 타이르며 ‘광주에 ‘야소교’가 새로 들어왔는데 이를 믿으면 노름도 하지 않고 새사람이 된다.’며 광주양림동 책방에 근무하는 조상학 (1877∼1950·공산당에 순교)을 소개해 주었다.

소개 받고 귀가 솔깃해진 박희원, 서병준, 장기용(당시 40세)등은 1904년 광주까지 3일 길을 걸어가서 조상학을 만났다. 그들은 복음을 들었다. 그리고 목포에서 선교 활동하던 오웬(오기원) 선교사를 찾아갔다. 더 자세한 전도로 감동을 받고 믿음을 결심한다. 그들은 웅동으로 돌아왔다. 즉시 집 한 칸을 빌려서 예배드린 것을 계기로 광양에 복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예배하는 교인 수가 점차 늘어나, 1905년에 인근 신황리에 한옥 8칸 목조건물을 신축하여 광양 최초의 예배당인 신황교회가 설립되었다. 전남 동부와 경남 하동지역에 마침내 복음을 전하는 선교기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신황교회는 광양지방 모든 교회의 모체로써 각처에서 모여든 교인들이 주일이면 6,7백명씩 되었다. 마침내 한 주일에 120명이 세례 받은 역사도 있다. 서병준은 열심히 전도하여 마을의 19가구 전체가 예수를 믿었다. 처음에는 신황교회로 출석하다가 1908년 웅동교회를 건축하였다. 신황교회는 1908년 대방교회, 진상교회, 웅동교회로 분리되었다. 한편 박희원, 서병준, 장기용, 한태원 등은 그 후 장로가 되어 헌신 하였다.

특히 박희원은 1939년 전도인 임명을 받고 광양지역은 물론 순천, 여수, 구례, 벌교, 고흥, 보성 지역을 두루 다니며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하였다. 한편 광양의 교회들은 복음을 전파하는 역할 외에도 일제 강점기 민족교육을 위한 광신학원을 설립하여 지역 인재육성의 요람이 되기도 하였으며 수많은 목회자와 항일 독립 운동가도 배출 하였다.

▲ 광양시 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관

1990년 신황교회에 부임한 최수남 목사는 2007년 신황교회 민속문화전시관을 신축 개관하였다. 또한 2008년에는 광양시와 광양선교100주년기념사업회가 수년간 노력한 결실로 <광양시 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관>을 건립 개관하였다. 웅동 지역의 역사적 상징성을 고려하여 웅동(곰골)마을에 세워진 <광양시 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관>은 지하1층 지상3층 규모로, 각 층별로 한국선교역사, 광양지역선교역사,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순교자기념관실 에는 한국순교자 214명의 영정과 유물이 있으며 한국기독교선교역사의 애국정신과 순교정신을 고증하고 있다. 기념관 뜰에는 양용근, 안덕윤, 조상학 목사 순교기념비가 있다. 이들은 신사참배 거부로 구속 수감되었고, 양용근 목사는 옥사, 안덕윤, 조상학 목사는 공산당에 의해 순교를 당했다. 한편 기념관 관장을 맡은 서승기 목사는 웅동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로, 현재 웅동교회 시무목사로 고향교회를 지키고 있다.
▲ 박경진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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