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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비전과 기독교인의 역할 - 독일 통일 사례를 성찰하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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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남북 분단과 통일 과제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바쳐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요즘에 듣기 어려워진 동요. 그러나 오랜 기억 속에서부터 들려오는 노래이다. 이렇게 통일은 한국인의 집단무의식으로 자리잡았다. 동족 상잔의 6.25 전쟁이라는 비극은 휴전 70년 세월에 거의 잊혀져가는 듯하고, 전쟁도 통일도 그저 정치 가십거리처럼 대우 받는 상황이다. “통일은 한민족의 숙명이다같은 장엄한 구호는 듣기 어려운 반면, “통일은 대박이다같은 실용적 접근법이 오히려 통일을 실질적으로 체감하게 한다고 믿는다. 더구나 그 용어가 국가원수에게서 발음되었다는 것이 의아스럽기는 했다.

 

 이제 통일은 마치 민족 고유의 명절, 설이나 추석이 그러한 것처럼 한국인의 내면과 관습에 하나의 거대한 유산이 된 듯 하다. 그리하여 진보이던 보수이던, 어떤 정치적 이념을 추종하던 통일은 공통의 주제임에 확실하다. 대한민국 헌법은 북한 영토를 우리의 국토로 기록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바로 그 통일이 유감스러운 것은 아직도 그 하나됨이 멀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특히 안타까운 점은 이산가족 문제이다. 1953년 이후 헤어진 수많은 이산가족은 이제 고령화를 너머 점점 고인이 되어간다. 문재인 정부 들어 김정은과의 판문점 거사”, 트럼프의 싱가포르 회담 등은 분명 통일을 꿈꾸게 만들었었다. 남북 화해 무드 속에서 핵실험장 폭파에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같은 사업들이 진척되리라 믿었었다. 그런데 옛말에 일장춘몽이라던가. 개성공단 사업소(건설비 무려 290)는 한방에 붕괴되고, 조선중앙방송의 소대가리 운운, 관광은커녕 미사일 발사에 핵 위협은 통일의 꿈을 다시 흔들어 놓고 있다.

 

 이제 문재인 정권이 막을 내리고, 윤석열 정권이 건립하는 시기이다. 진보와 보수에 따라 대북정책이 변화를 겪었으니 또 다시 대북정책 변화가 있겠다. 화해와 강경 사이에서 대한민국은 주변 국제 관계를 주도적으로 활용하여 끝내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이끌어 내야 한다.

한편 우리는 북한 주민의 삶과 인권에 대한 문제를 도외시할 수 없겠다. 강도만난 이웃을 돌보지 않으면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야기하며, 불의가 판치는 세상을 곁에 두고 어떻게 하나님의 공의를 말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더 이상 부끄러운 모습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분단과 통일에 얼마나 마음과 열정, 지혜를 다하고 있는지 냉철하게 되짚어 봐야 한다.

 

 정권은 변해도 국민의 안위와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굳건히 지켜져야 한다. 이에 사랑과 공의를 삶의 근간으로 삼는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분단과 통일에 관하여 역사적 모범 선례를 남긴 독일을 살펴보므로, 한국 기독교인과 교회의 역할에 관해 반성과 함께 실천 방안들을 숙고해 보고자 한다.

 

 ii. 역사가 기억하는 1989, 1990

 

 1990년은 독일 역사, 세계 역사의 큰 획을 긋는 의미깊은 해이다. , 서독으로 분단되었던 독일이 통일된 해이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1990103일이 그날이다. 당시 서독 콜(H.Kohl) 수상이 통일을 선포할 때 세계가 체험한 것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어떻게 이렇게 통일이 갑자기 이뤄질 수 있는가. 소련 대통령 고르바초프가 그 전에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 운동을 시작하여 사회주의 위성국가의 민주화가 이뤄지게 하였지만 독일 통일은 정치나 전략으로 불가능해보였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통일이 성취된 것이다. 불가사이했던 분단 문제가 해결되자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했다. 한편에서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며 역사의 섭리자되시는 하나님께 경외감을 나타내며 감사와 찬양을 돌리었다.

 

 남북으로 분단된 우리에게 독일 통일은 가슴사무치게 부러운 거사였다. 그래서 그 날을 쉽게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통일 그 자체보다 더 역사적이고 역동적인 사건이 있었다. 통일을 이룬 전야제 같은 거대한 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동독 국민들이 사회주의 정권에 대항하여 일으킨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1989년을 정점으로 열기를 더했고, 결국 소련의 위성국가였던 동독을 무너지게 했다. 그것을 동독 평화혁명”(Die friedliche Revolution)이라 명명한다. 이 역사적 거사를 전제하지 않고 통일을 논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1989년은 독일 역사에 큰 획을 긋는 대전환점이 된 해였다. 1990년 독일이 분단의 역사를 끝내고 통일할 수 있었던 것도 1989년 동독 평화혁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만약 1989년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독일 통일은 불가능 했을 것이다. 당시 서독 국민들은 통일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동서독 격차 (민주주의-공산주의 정치적 구조, 경제적 격차, 민주 자본주의와 공산 집단체제에 따른 의식, 교육, 라이프스타일 차이 등), 통일분담금, 그 외 절차 등이 만만치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서독 국민들은 통일이 자신들에게 미칠 직접적인 혜택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독일 주변의 유럽 강대국들도 통일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동독 국민들이 우리는 무장하지 않았다” “폭력을 거두라” “우리는 한 민족이다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던 것이다. 이런 상황 가운데 동독 전역에서 자유화 물결이 다시 응집되어갔다. 그러면 교회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행동하고 있었는가?  추태화 소장 (이레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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