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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교계의 연합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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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용상 기자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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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교계를 이끈 사람들

한경수 감독

 

 

지난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에 의해 복음이 처음 들어온 성시 인천에서 한국교회의 각 교단 중앙지도부의 분열현상이 마무리되면서 인천지역 복음화를 위한 협력과 교회간의 화합, 연합사업을 목표로 지난 1963년에 발족된 인천기독교연합회.

지금은 인천의 3000여 교회와 100만 교인을 대표하는 기관으로 지금까지 부활절연합예배를 비롯한 공통적인 선교사업을 비롯해 각 교파간의 친교 및 협동정신을 통해 인천 지역의 복음화와 성시화를 위해 주력하고 있다. 이에 본지에서는 지금의 인기총이 있기까지 그동안 기도하며 터를 닦아온 인물들을 만나 라이프 스토리 및 최근의 근황과 인기총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편집자 주>

 

 

 

 

 

 

지난 1982년 제21대 인천기독교연합회장을 지낸 한경수 감독(주안감리교회 원로목사)은 암기동안 인천기독교 연합 사업을 이끌어 나갔던 대표적 주자로서 인천성시화와 발전은 물론 지역교회 연합을 위해 헌신한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연합회장으로 활동하면서 한 감독은 3.1절 연합예배를 비롯해 부활절연합예배, 각종 구제사업, 나라와 민족을 위한 조찬기도회 등을 통해 인천지역 교회의 연합에 앞장서 왔으며, 특별히 1979년부터 시작했던 교회성장 세미나를 활성화하여 인천지역 교회 성장에 많은 기여를 했다.

또한 인천을 복음화 하여 신앙실천을 일으켜 인천을 성시화 하고 살기 좋은 인천을 만들기 위하여 발족된 인천성시화운동본부 이사장을 맡아 인천성시화 대성회를 통해 인천교회의 부흥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청소년 찬양축제 등의 개최를 통해 인천의 기독교선교운동과 교회연합운동의 중심에서 헌신했다.
이밖에도 한 감독은 국제와이즈멘 한국 지구 새인천 클럽 초대회장을 비롯해 인천시 남구 정책자문 위원, 남구 청소년대책위원회 위원, 한국기독교 백주년기념탑 건축위원장, 인천직할시 신우회 지도목사, 인천소년 교도소 종교위원, 기독교선교문화연구회 이사장, 기독교 텔레비전 선교 후원회 지도위원 등 교파를 초월한 연합사업과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일에 앞장섰다.

특별히 한 감독은 회장 임기가 끝난 이후에도 인천의 기독교발전을 위해 많은 공헌을 하였는데, 이 가운데 인천 선교의 역사적 조형물인 선교백주년기념관 건립 시 건축위원장을 맡아 건립에 큰 공헌을 했으며, 국제성서박물관 건립을 통해 인천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선교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45년의 기나긴 목회여정을 마감하고 지난 1997년 목회일선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한 감독은 매일 아침 10시면 어김없이 자신의 집무실인 주안교회 교육관 4층에 자리하고 있는 성서박물관 관장실로 출근해 퇴근하는 3시까지 자리에서 꼼짝 않고 책과 씨름을 하며 80이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매일 한 권씩의 책을 읽는다.

‘책의 사람’이라고 불릴 정도로 책을 안고 사는 한 감독의 서재와 자료실에는 색 바랜 자신의 신학교 시절 필기노트를 비롯해 고서점을 연상케 할 정도의 고서들과 각종 책들이 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다.
중학교 시절 육상부로 활동하면서도 교내 독서부에서 문예부장을 할 정도로 책 읽는 것을 좋아한 그는 책을 가리지 않고 읽었다. 원래 성격이 조용하고 말수가 별로 없는 그에게 책은 매우 친한 벗이었고, 하루 종일 독서를 해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이렇게 몸에 밴 독서습관이 오늘날까지 그를 책의 사람으로 불리우게 만들었다.

책을 읽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는 한 감독은 “하루 10시간 이상을 책을 읽어도 눈의 피로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복 중의 하나”라고 말하며 미소를 짓는다.


◆철저한 어머니의 신앙교육

모태신앙으로 신앙의 가정에서 어머니로부터 가혹하다고 할 정도로 철저하게 신앙교육을 받았다. 어머니는 그를 교회에 데리고 다니면서 무릎에 앉히고 성경을 읽어주면서 하나님의 종이 되길 기도했다. 어머니는 마지막 하늘나라에 가시면서 아버지에게 “우리 경수를 꼭 주의 종으로 만들어 주세요”라는 간절한 부탁을 했다.

군에서 영양실조로 의병제대를 한 그는 동광중학교에서 국어와 체육을 담당하는 교사로 근무하면서도 늘 어머니의 신앙의 대를 이어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교사로 근무하면서도 교회에서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면서 어느 때는 설교도 하는 등 언제나 목회자보다 더 많은 일을 하여 성도들이 교회 전도사로 생각하기도 했다.

조산교회 권사로 봉사하던 중 우연한 기회에 길정교회를 담임하게 되었고 본격적인 목회를 하기 위해 결혼 후 신학공부를 하려고 가족들을 뒤로하고 부산으로 내려가 장로회신학교에 입학을 했다. 생활고로 인해 휴학을 한 후 안양의 삼막동에 있는 소년원 분원에서 성경을 가르쳤고 웨슬레 구락부를 시작하여 나중에 삼막교회(신안양교회)로 태어나게 되었다.

의식주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그는 교회 부흥과 자신의 영적무장에 대한 고민을 했다. 이에 삼각산 기도원을 찾아 일주일동안 오로지 기도에 전념하며 하나님께 매달렸다. 삼막교회에서 1년여 목회를 한 후, 분열로 어려움을 겪는 발안교회로 부임하여 영양실조에 걸린 자식들을 위해 개구리를 잡아 먹이기까지 하는 등 그야말로 가난을 훈련받는 광야 같은 생활을 했다.

이후 도화교회에서 초빙 제의가 들어와 인천의 도화교회로 부임했다. 하지만 도화교회는 전도관의 영향으로 교인이 거의 떠나 풍비박산이 되었고, 담임자는 도화교회를 떠난 상태였다. 이에 부임 후 기도하고 말씀대로 하고 전도하는 일에 주력했다. 하지만 여권사의 장로 추천 부결사건으로 결국 만수교회로 옮기게 되었고, 역시 전도활동에 총력을 기울였다. 만수교회에 온 지 3년째 되는 해인 1964년 목사안수를 받게 되었다.

만수교회가 부흥을 거듭하던 중 주례를 해 준 교회 총각이 유부남으로 밝혀져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어 만석교회로 부임하게 되었다. 평소에 목회하면서 그가 간직한 확고한 목회철학은 “목사는 기도와 전도를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후 만석교회에서 3년 목회를 마치고 주안교회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고 은퇴하기까지 심방과 속회중심의 목회에 전력하여 제3성전을 건축하고 주안교회를 부흥 발전시키는 일에 온 힘을 다 쏟았다.


◆중부연회 감독으로 헌신하다


목사안수를 받은 후 목회에 전력하던 그는 1973년 인천동지방 감리사를 지내면서 어려운 교회를 돌보는 일에 앞장섰다. 이후 감리회 본부 교육국과 선교국 위원으로 일하면서 감리교회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 한 번의 패배를 맛본 후에 1988년 제18회 감리교 총회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중부연회 19대 감독으로 피선되었다.

감독에 당선된 이후 농어촌지역 교회 목회자 생계비 지원 등을 비롯해 준회원 영성훈련, 해외선교지방 설립, 평신도국 위원장으로 평신도 공과 제작, 경기연회의 분할 등 많은 일을 이루어 나가는 데도 오로지 모든 연 회원을 섬기겠다는 자세로 2년의 임기를 마쳤다.


◆국제성서박물관 개관을 하다


성전 건축 후 교회는 계속 놀라운 성장을 하게 되어 21세기 교회학교의 장기적인 비전을 위해 1995년 교회 창립 70주년 기념 교육관을 봉헌했다. 또한 교육관 5층에 국제성서 박물관을 개관하게 되었다.

국제성서박물관은 1456년에 발간된 구텐버그 성경 원본 2권을 비롯해 킹제임스 성경 원본(1611년판) 등 2만여권의 희귀한 성서를 소장하고 있고, 성서 시대의 유물 등 인류 문명의 발전 형태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교육현장으로 세계적인 박물관으로 손색이 없고 지금까지도 많은 청소년들과 교인들의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원래 수집하는 일에 취미가 있었던 한 감독은 특별히 역사에 관심이 많아 역사 자료가 될만한 것들은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고 수집했다. 세계 여러나라를 다니면서 그 나라와 고장의 우표, 동전, 열쇠고리는 물론 고서적 성경 등 보이는 대로 수집했다.

지금도 외국을 나갈 경우 성경을 찾기 위해 고서점들을 집중적으로 찾아다니며 희귀한 성경들을 모았다. 그러던 중 미국의 성서 수집가 웨이커필드를 만나게 되었다. 웨이커필드박사의 성경이 소장돼 있는 임마누엘대학 장서실에는 엄청나게 귀한 성경이 많이 있었지만, 너무 가격이 비싸 도저히 사겠다는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한 감독의 성서에 대한 열정을 보고 웨이커필드 박사는 자신의 성경을 모두 기증을 했다.


◆기본에 충실한 목회자 되라

45년의 기나긴 목회여정을 걸어온 목회의 선배로서 한 감독은 후배 교역자들에게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 목회에 전념할 때 교회서 잠을 자느라 집에서 잠을 잔 적이 거의 없다는 한 감독은 “요즘 목회자들이 너무 바쁘다 보니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기본에 충실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영성이 약해지고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울러 책을 읽는 목회자가 되어 시대의 변화에 대처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나 자신이 부지런하면 교인도 부지런하고 직원들도 부지런하다”며 근면과 정직을 평생 목회철학으로 지녀온 한 감독. 지금도 책을 한 권 다 읽을 때마다 반드시 읽은 날짜를 기록하는 꼼꼼함을 보이고 있다.
그를 보면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안중근 의사의 말이 새삼 생각나게 한다. 비록 몸은 늙었지만, 날마다 책 속에서 진리를 찾아내는 즐거움을 만끽하며 정신적으로 더욱 젊게 사는 한경수 감독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인천의 교회들이 개교회주의로 흐르면서 연합정신이 쇠퇴하고 있는 점을 안타깝게 생각한다면서 “물론 개교회의 성장도 중요하지만 연합을 통해 할 수 있는 큰 일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인천의 교회들이 선배들이 쌓아놓은 연합정신을 훼손시키지 않고 더욱 인천 성시화와 복음화를 위해 주력해 달라”며 당부를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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